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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pr 17. 2017

내 과거 속을 걷고 있던 너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갓 스무 살, 스물한 살, 그쯤? 

   맨 정신으로 지낸 날이 거의 없었다. 합법적으로 술 마실 수 있게 되고부터, 내 모든 관심이 음주에 쏠려 버린 까닭이다. 나는 가족들과도, 친구들과도, 지인들과도, 술판을 벌이기에 바빴다. 하루에 두어 개의 술 약속을 잡기도 했다. 

   쪼그만 게, 어지간한 애주가였다. 

   음주에 대한 제약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그간 억압돼 온 호기심과 욕구의 에너지가 터지게 나온 것이다. 좀 더 건전한 종류의 자유에, 호기심과 욕구를 품어 왔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물론, 방금 말한 ‘더 좋았을 테지만.’은, 서른 살 먹은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느끼는, 약간의 비난이나 후회의 다른 말인, ‘더 좋았을 테지만.’일 뿐이다. 실제 그 시절을 살았던 나는, 내가 택한 버전의 그 자유 속에서 충분한 재미를 느꼈고, 그건 그 당시 내게 ‘가장 좋은 옵션’이었다.

   몸과 정신이 건전하기만 한 자유(독서? 등산?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러 떠나는, 여행? 뭐, 그런 거?)가, 그 당시 내게 ‘가장 좋은 옵션’은 아니었던 것이다. ‘가장 좋지 않은 옵션’일지도. 

   그 나날은 그 나날 나름대로, 내게 아주 유익했다.    





   아무튼, 그 무렵, 술에 왕창 취해서, 어딘가로 떠난 적이 있다. 한밤중이었다. 차에서 내려 쌀쌀한 밤거리를 걸으면서도, 나는 현실 감각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또 다시 술 마시러 가자는 얘기에만, 간신히 집중할 수 있었다. 슈퍼에서 과자 한 봉지를 사 온 친구가, 나를 들여다보며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난다. 내 얼굴 보니까, 빨간 풍선이 둥둥 떠다니는 거 같다고, 하면서.

   그 슈퍼. 그 슈퍼가 있던 골목.

   최근에 네가 SNS에 올린 사진. 몸에 힘 빼고 가만가만 걸어 나가는, 네 모습이 담긴 사진. 그 사진의 배경이, 그 골목이었다.

   노트북 모니터에 코끝이 닿도록, 나는 네 사진을 자세히 살폈다. 아무리 봐도, 그 골목이 맞았다. 만취한 채로 아무데서나 잠들 수는 있어도, 술 때문에 필름 끊기는 일은 없는, 내 기억 속 그 골목이, 그 골목이 맞았다.    

   기막힌 우연이었다.

   유명한 골목이 아닌데. 아니, 이름 있는 골목도 아닌데. 너는 왜 그 골목에 있었을까. 그 골목에서 찍힌 사진을, SNS에 올린 걸까. 아무 의미 없는 행위였을까. 

   하여간, 그 골목처럼, 너도 내 먼 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쓰리게 감각했다. 쓰릴 줄 몰랐던 감각이, 쓰리게 올라왔다.    


   그 사진. 마치, 네가 내 과거로 걸어 들어간 듯한 기분을 안겨다 주는 사진이었다.    


   나는 그런 너를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다가, 한편으로는 너와 그곳에 대한 모든 기억을 이만 다 잊어버리고 싶다가, 모든 생각이 빠져 나가고 희미한 애틋함만 남은 머리 위에 손바닥을 얹어 보다가, 소리 없는 한숨과 함께, 약간 뭉개진 눈빛과 함께, 너를 그리워한다.

   헤어지고 그립지 않은 사람이, 참 많은데. 너도 그런 사람일 줄 알았는데. 헤어지기 전부터 너를 미워했으니, 그리움 같은 게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네가 그립구나. 

   언젠가, 아파트 계단을 뛰어 내려오던 네 발소리. 자주 너를 기다리던 내 어깨 뒤쪽을 치며, 불쑥 나타난 네 얼굴. 아기처럼 ‘헤’ 하고 웃던, 네 웃음소리. 밥은 먹었는지, 몸은 어떤지, 기분은 괜찮은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자신과 함께하지 않은 세월은 어떻게 보내 왔는지, 내게 쉴 새 없이 물어 보던, 네 다정한 궁금증. 멀리서도 나를 한눈에 알아보던, 나에 대한 네 기묘한 관찰력. 

   그 모든 것들이, 그립다. 사무치지는 않는데, 떨쳐지지도 않는 강도로, 그립다.    


   어쨌든 그리운 너를, 그리울 만큼 좋아한 너를, 나는 왜 미워했을까.

   지나고 나면 가장 부질없는 게, 미움이구나.    


   참았을 걸. 아니, 못 참았으면 못 참은 대로, 그냥 지나쳐 보냈을 걸.

   내가 견뎌내지 못한 모든 미움과 함께 너를 보내고 남은 지금, 나는 네가 그립다.    


   예쁘던 너만 이곳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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