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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pr 13. 2017

느낌의 세계에서 온 사람



   “전후 사정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말구요. 모든 것들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말구요. 그냥 느껴 보세요. 오늘 하루를. 그게 전부예요.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그게 뭔 소리예요? 당최 납득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뭘 느껴 보란 말이에요? 게다가, 엉성하다고 할 수조차 없는, 갖춰진 게 아무것도 없는 이 상태를, 해결하는 것도 아니고,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느껴 보는 게 전부라구요? 오늘 우리가 해야 할? 나 지금 누구랑 얘기하는 겁니까? 당신, 제정신이에요? 온종일 너무 경황없어서, 얼이 다 빠진 겁니까?”

   “당신의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데요? 당신의 느낌은, 납득에서 옵니까?”

   “…….”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까?”

   “글쎄,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질문이라서요.”

   “질문 이전에 내가 한 말이, 당신을 화나게 했습니까?”

   “답답하게 했어요.”

   “어디서 막힘을 느꼈길래요?”

   “모든 곳에서요. 앎도, 이해도 없이, 느끼라는 거. 그게 전부라는 거. 그것들 다, 나를 답답하게 만듭니다. 나는 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들이라서요.”





   “앎도, 이해도 없이, 다만 느끼는 세계. 느낌만이 전부인 세계. 그 세계에서 살아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군요.”

   “그 세계가, 있기나 합니까?”

   “있습니다. 그 세계.”

   “있다면, 나는 왜 그 세계를 본 적이 없습니까? 살아 본 적은 둘째 치고, 나는 그 세계를 아예 본 적이 없다구요.”

   “그 세계는, 외부에 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는, 개인적인, 내부적인 세계입니다.”

   “어렵군요.”

   “어렵지 않습니다. 한 순간의 선택으로 갈 수 있는, 그런 세계입니다. 노력으로 도달하는 세계가 아닙…….”

   “그 선택까지가 어렵다구요.”

   “그 얘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 선택이 있기까지,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을 겁니다.”

   “당신은, 그 세계에 살고 있습니까?”

   “네, 얼마 전부터요. 아주 어릴 때까지는, 우리 모두 그 세계에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느낌 이외의 것들이 지니는 중요성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세계를 제각각 빠져 나오게 되는 거구요. 아무튼, 저는 다시 그 세계로 돌아왔습니다. 최근에요.”

   “그렇군요.”

   “아직 적응 단계입니다. 그래서 내가 방금 당신에게, 내 세계의 방식을 권한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좀 전에, 내가 당신에게 결례를 범했습니다.”

   “그건 또 뭔 소리요?”

   “당신이 당신 세계에 머물기로 한 것보다, 내가 내 세계로 머물기로 한 것이, 더 나은 선택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한 우월감에 빠져서, 자꾸 사람들을 내 세계로 초대하려 합니다. 인도引導, 하려고 합니다. 내가 성스럽다고, 자주 착각합니다. 무의식적으로요.”





   “뭐, 결례까지야. 욕을 한 것도 아니고, 날 한 대 친 것도 아닌데요. 괜찮습니다. 마음 쓰지 마세요. 근데, 당신이 당신 세계에서 모든 적응을 다 끝내면, 그때 당신은 어떻게 되는데요?”

   “고요가 올 거라고, 들었습니다. 고요, 평화, 그런 것들이 올 거라고.”

   “당신에게로요?”

   “모든 곳으로요.”

   “어렵군요.”

   “어려워해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정상이지 않은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에게도, 내게도. 예전에는, 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느낌의 세계를요.”

   “예전의 당신처럼, 나는 당신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당신이 살고 있다고 하는, 그 세계도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느낌의 세계로 갔습니까? 앎과 이해의 세계, 분명하고 좋지 않습니까?”

   “좋았습니다. 사실, 나는 그 세계에서 꽤 유능했습니다. 앎과 이해로 울타리를 짜고, 그 속에서 계획적이고 예상되는 삶을 이루는 거,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세계는 나를 숨 막히게 만들었습니다. 그 세계는 본질적으로, 나와 맞지 않는 듯했습니다. 그 세계 이상의 뭔가를, 나는 끊임없이 갈망했습니다. 지식이나 평생 쌓으려고 내가 태어난 건 아닌 듯하다는 생각에, 나는 계속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지식이 아닌, 나만의 새로운 뭔가를 찾고 싶었고, 그런 것들로 삶을 구성해 나가고 싶었습니다. 그 바람은 갈망이 되었고, 채워지지 않은 갈망은 괴로움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괴로움이 극에 달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는 선택했습니다. 앎과 이해의 세계를, 이만 떠나기로요.”





   “그래서, 찾았습니까?”

   “뭘요?”

   “앎과 이해의 세계 이상의 뭔가를요. 당신만의 새로운 뭔가를요.”

   “아, 네, 찾았습니다.”

   “찾은 게, 뭔데요?”

   “생생함이요.”

   “생생함?”

   “또 어려운 말처럼 들릴 거, 압니다.”

   “알아주니 고맙군요. 당신만 괜찮다면, 나는 그 생생함에 대해, 좀 더 들어 보고 싶은데요.”

   “생생함. 생생함. 앎과 이해를 벗어난 곳에, 생생함이 있습니다. 앎과 이해는 일정하지만, 생생함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앎과 이해의 틀 속에 넣어, 고정시키지 않은 거라, 항상 변합니다. 뭐라고 알아차려지지도 않은, 뭐라고 납득되지도 않은, 그 생생함은, 그 자체로 가능성입니다. 가능성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는 공식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가능성이 현실화된다 해도, 그걸 현실화시킨 방식이, 그걸 현실화시키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이곳에서는요. 그래서 생생함은, 규칙에 가둬지지 않은 무엇입니다. 그래서 생생함은, 무질서와 같습니다. 생생함을 가진 나는, 무질서합니다.”

   “그게 뭐가 좋습니까?”

   “질서가 없어서, 제한도 없습니다. 그래서 생생함은, 무한함과 같습니다. 생생함을 가진 나는, 무한합니다.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한 정의를 버렸기 때문에, 나에 대해 지켜야 할 규칙과 약속이 없는 까닭입니다. 생생함의 세계에서, 나는 어떤 특정한 존재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의 삶이 내일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법칙 같은 게, 없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듣기에는 좋네요. 불안하지는 않습니까? 당신 세계에서 사는 일이. 원래 당신이었던 것들 없이, 사는 일이.”

   “아직 적응 중이라, 불안할 때가 여전히 있습니다.”

   “불안할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기억합니다.”

   “뭐를요?”

   “불안해하는 건, 앎과 이해의 세계에 살던 습성에서 나온 반응이라는 걸. 불안해하는 건, 통제가 필요하다는 욕구에서 비롯된 거라는 걸. 진짜 내가 원하는 건 자유이지, 또 다시 속박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걸. 그것들을 차근차근 기억해 내다 보면, 불안이 차츰 줄어듭니다.”

   “대단하군요, 그 의지력이.”

   “의지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의지력이 없어야, 그 어떤 강제성도 없어야, 마음이 가라앉혀집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쓸수록, 마음은 뿌옇게 흐려집니다. 물이 든 컵 속에 섞인 모래를 가라앉히려면, 그냥 컵을 가만 내버려둬야 합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나는 아직 그것에 서툽니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음으로,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그렇습니다.”

   “당신 말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 세계에 관심이 있습니다.”

   “내가 한 말은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 느낌.”

   “네, 그런 식입니다. 모든 게.”

   “그렇군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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