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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pr 12. 2017

다시 볼 날을 그리며



   이렇게 먼 곳에서 쓰는 편지는, 처음이군요.

   잘 지내고 계십니까. 오늘 이곳에는 눈이 내립니다. 새벽부터 내렸어요.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 온 동네가 눈으로 가득합니다. 

   저 새하얀 길을 걷다 보면, 금세 눈사람이 될 것 같아요. 눈사람 정도가 아니라, 그냥 얼음 덩어리가 되어 버릴 것 같기도 하고.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그러면서도 ‘한번 나가볼까? 나가서 걸어 볼까?’ 하는, 장난스러운 충동이 듭니다. 온몸에 눈을 묻힌 채로, 사방팔방 돌아다녀 보고 싶은, 그런 앳된 마음이 드는군요. 

   이 장난기를, 당신과 나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 장난기에 자주 웃던 당신이, 그립습니다. 염치도 없이, 그립습니다.    

   내가 떠나 올 때, 당신이 앓고 있던 가벼운 감기는, 이제 자취를 감추었는지요. 아니면, 아직 당신, 그 엷은 감기 기운을 갖고 지내시는지요.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여러 방면으로 당신을 생각해 보는 아침입니다. 

   보고 싶습니다. 당신 뺨에 손바닥을 대고 싶습니다. 그러고 있으면, 모든 종류의 평온이 나를 채우곤 했었는데.    





   별다른 상의도 없이, 이렇게 멀리 떠나 와 버린 내가, 밉지 않으십니까. 어째서 원망 한 마디 없으십니까. 오히려 안달하는 마음이 되는 건, 내 쪽이군요. 

   많이 보고 싶습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많이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모든 걸 두고 돌아서지 않으면, 단 한 번이라도 그러질 않으면, 내가 나를 두고 어딘가로 돌아서버릴 것 같아서, 이번에는 정말로 떠나야 했습니다. 

   그 아슬아슬함이, 나와 내 삶 사이의 그 팽팽한 신경전이, 당신 눈에도 보였던 것입니까. 그래서, 얼마간 떠나 있겠다는 내 말에, 당신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던 것입니까. 울지도, 웃지도 않고. 빨리 오란 말도, 영영 오지 말란 말도 않고.

   당신도 나를 구해내고 싶었던 것입니까. 나를 잡아먹던, 내 낡은 패턴으로부터.    


   당신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까. 나 자신과 친밀해지지 못한 까닭에, 점점 더 많은 것들과 싸우게 되던 나를. 나 자신을 열지 못한 까닭에, 점점 더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던 나를. 그렇게 자꾸만 고립되어 가던 나를.  

   알고 있었겠지요, 당신은. 그래서, 묵묵히 내 뒷모습을 참아냈던 것이겠지요.    





   보내 준 편지, 잘 받았습니다. 

   당신이 내게 말했었지요. 

   텅 비우러 갔으니, 무사히 텅 비어지라고. 언제가 됐든, 돌아와서도, 내내 텅 비어 있으라고. 그렇게, 남은 삶은 모두, 탁 트인 채로 살라고. 그 어떤 얽매임도 없이 살라고. 당신이 그렇게 완전히 비어진다 해도, 나는 당신을 알아보고, 당신의 핵심을 느낄 수 있다고. 잡다한 것들이 뒤섞이지 않아, 오히려 당신을 더 잘 볼 수 있겠다고. 당신이 붙잡지 않는다 해도, 당신으로부터 떠날 생각 없으니, 안심하고 거기서 잘 지내기나 하라고. 시간을 초월한 곳에서, 안타까움도, 기다림도 없이, 나는 그저 살고 있겠다고. 잘 지내고 있겠다고. 부디 미안해 말라고. 당신이 간절해 하는 당신의 그 상태를, 나도 간절해 한다고. 이 시간은, 당신을 잃지 않기 위한 시간이지, 당신을 잃고 있는 시간이 아니라고. 나는 당신을 잃은 적이 없고, 잃을 일도 없을뿐더러, 당신은 무슨 수로도 잃어지지 않는 존재라고. 당신과 내 연결이 파괴되는 일 같은 건, 발생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비로소 당신으로 서는 당신 삶에, 당신만 남는 당신 삶에, 집중하라고.

   당신이 내게 말했었지요.    


   그 편지를 읽고, 사실, 많이 울었습니다. 나 자신을 그렇게 혐오하면서도, 내가 나를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건,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었기 때문임을 깨달아서. 그 깨달음이 감사하고 또 죄송스러워서. 엄청난 온도와 소리를 가진,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듬해 봄에는 어떤 풍경으로 꽃이 피겠습니까. 아무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걸 말끔히 지워 버린 내가, 그 봄쯤에, 당신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 했지요. 당신은 내 겉치장이 아니라, 내 핵심을 통해, 나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 했지요.

   아무 증오도, 후회도, 슬픔도 없는 바람이 되어, 당신에게로 불어가겠습니다. 

   당신은, 나를 느낄 수 있을 거라 했지요.    


   당신 곁이 아닌 곳에서, 벌써 두 계절을 보냈습니다. 두 계절 만에 받은 당신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실감했습 니다. 이 두 계절 동안, 참 많은 것들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갔음을. 텅 비워지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임을.    

   모든 걸 두고 떠나 온 이곳에서, ‘진짜’인 내 중심만 남기고, 나머지는 죄다 내려놓고 있는 이곳에서, 나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당신은 내가 절대 떠날 수 없는, 내려놓을 수 없는, 내 중심부에 속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당신은 내 일부가 아니라 전부라고, 내가 말했던 이유를. 아니, 알고 있었겠지요, 당신은.    

   건강하십시오. 염치도 없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가 되어 가는 이 날들 동안,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볼 날, 내 눈 속에서, 당신 모습이 더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 시야에 선명하게 맺힌 당신을 며칠 내내 바라보며, 그 놀라운 안정감에 전율하며, 나는 그 봄을 보내겠습니다.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카쿠코 매거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거진을 통해 소설집과 산문집을 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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