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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pr 11. 2017

망설이는 사람의 일기장

   신호.

   신호.

   내가 그 사람에게 원했던 건, 대단한 사랑이 아니라, 신호였다. 아무 신호라도 좋았다. 내가 알아볼 수 있을 만큼만, 딱 그만큼만 분명한 신호라면, 그게 뭐든 좋았다.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아니, 바랐지만. 바랐지만! 나는 그 바람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으므로, 그 바람은 ‘감히’에 속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바람은 언제나 내 상상 속에만 존재했다.  

   내 현실 속에 머무는 바람은, 그 사람이 내게 작은 신호를 보내 주는 것에 대한 것, 그것뿐이었다. 내가 ‘직접적으로’ 그 사람에게 바라는 유일한 건, 그것뿐이었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 사람에게 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처음이자 최후일 것이,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신호.

   신호.

   내 마음을 전해 받았다는, 당신의 신호. 작거나, 더 작아도 좋을, 당신의 신호.    


   내 세계와 너무 먼 세계에 사는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그 미묘한 신호를 기다리는 순간들로 이뤄져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유치한지. 그 기다림이 얼마나 치사한지. 하지만 나는, 그 기다림을 마음대로 중단할 수 없었다.

   기다리지 말아야지, 비겁하게 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는,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 당신 세계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그런 채로 시간을 보냈다.

   내 마음, 그곳에 잘 도착했을까. 이번에는 그것이 당신 앞에 도달했을까. 당신 안에 잠시 머금어지기도 했을까. 아, 어떨까. 어떨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유치한지. 그 기다림이 얼마나 치사한지. 나는 당신이 보내 올지도 모를 신호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그 신호가 있은 후에야 당신 세계로 아주 넘어갈 것을, 다짐했다. 우리 관계에, 일종의 조건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얼마나 계산적인가. 당신에게 최소한이라도 수용 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당신에게 내 모든 걸 걸지 않겠다는, 그 치밀함, 그 치졸함이, 얼마나 너저분한가. 

   나는 그 더러움을 수없이 뿌리쳤으나, 오늘도 그것들 속에 있다.

   당신의 신호를, 나에 대한 당신의 최초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느라, 어지러워진 눈빛을 가진 나를, 나는 당신에게서 영원히 추방해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이 탁한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나는 쉼 없이 눈을 감고, 마음을 닦아 왔다. 

   당신과 상관없이 당신을 사랑하려면, 내가 뭘 해야 할까.    


   이따금, 내 모든 게 갈기갈기 흩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하기는 처음인데. 수 억 개의 태양 같은 내 사랑인데. 이 찬란함만큼의 어둠이 나를 수시로 뒤덮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나는 당신이 두렵다. 내가 두렵다. 왜인지는 모르고, 바로 다음에 올 순간이 처절하게 두렵다. 모든 게 집어삼켜질 것만 같다. 모든 게 망쳐져 버릴 것만 같다.

   사랑 때문인가. 사랑이 커지면, 원래 이런 현상이 벌어지나. 너무 부푼 사랑 때문에, 모든 게 어디로든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이 느낌을, 나 아닌 다른 사람도 느꼈나.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내가 터져 새로운 우주가 생길 것 같은, 엄청난 압력에 시달리며, 당신을 오늘도 명백히 사랑하며, 그런데도 당신에게서 여전히 떨어져 있으며, 당신으로부터 올 어떤 신호만을 기다릴 뿐이다. 유치하게. 치사하게.

   어떤 안전을, 나는 기다릴 뿐이다.    





   이토록 가까운 당신과 내 세계인데, 나는 당신과 내 세계를, 가장 먼 것들로 만들었다. 그토록 솔직한 당신인데, 나는 당신에게서 보다 분명한 신호가 나오길 기다리며, 당신을 계속 혼자 두고 있다.    


   어쩌면, 내가 기다리고 있는 이 신호, 당신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인가. 내가 뛰어넘어야 하는 장애물이, 내가 씻어내야 하는 불안이, 당신과는 조금도 관련 없는 것 아닌가.

   어쩌면, 내가 제대로 눈을 뜨기만 하면,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동안 당신이 지치도록 보내 온 신호들을, 아니, 신호 정도가 아닌 직설적인 메시지들을, 왕창 발견하게 되는 것 아닌가.    


   당신, 이미 내 세계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 아닌가.    


   지금 내 눈을 가리고, 내 마음을 닫아걸고 있는 게, 대체 무엇인가.




카쿠코 매거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거진을 통해 소설집과 산문집을 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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