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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pr 07. 2017

수상한 소포가 왔다



   2년 전, 소포를 하나 받았다. 갈색 봉투 속에는 USB 하나가 들어 있었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검은색 플라스틱 USB가.

   보낸 사람 이름은 없었다. 알 수 없는 그 사람, 나에 대해 그리 잘 아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회사 주소로 온 소포였으니까.

   USB를 받은 그 날 저녁, 나는 텅 빈 회사 휴게실로 들어갔다. 희미한 커피 향기가 휴게실에 고여 있었다. 컴컴한 휴게실 구석에 놓인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른 뒤, 나는 USB를 만지작거렸다. 


   국가 기밀 따위가 내 손으로 들어올 리는 없고. 컴퓨터 마비시킬 바이러스를 이토록 정성스럽게 보낼 만큼, 나한테 억하심정 가진 사람이 딱히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판단에 불과했다. 그러니, USB 안에 든 내용물이 얼마나 ‘안전’한 건지,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휴게실 컴퓨터에 USB를 꽂았다. 미안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약간 비현실적인 기분으로, 나는 USB 폴더를 열었다. 명치 언저리가 따끔거리고,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USB 폴더 안에 든 건, MP3 파일이었다. MP3 파일 달랑 하나. 컴퓨터를 병들게 할 바이러스 파일도 아니고. 어떤 비밀을 폭로할 문서 파일도 아니고. 얼마 안 되는 용량의 MP3 파일만이, USB 폴더에 저장돼 있었다.

   긴장이 풀렸다. 김이 빠진 것 같기도. 

   그런데 휴게실 컴퓨터에는 스피커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 MP3 파일을 한번 실행해 보았다. 그 파일에 대한 마지막 의심을 씻기 위해.  

   MP3 파일이 고요 속에 재생되었다. 3분이 지났다. 컴퓨터는 멀쩡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노트북을 켠 나는, 노트북 옆구리에 USB를 꽂았다. 그리고 1시간 전에 그랬듯, MP3 파일을 재생시켰다.

   “오늘은, 네, 거기 학생! 핸드폰 보려면 나가서 봐요. 결석 처리하지 않을 테니까. 핸드폰 보는 걸로 학생 혼내려는 게 아니야. 말하고 있는 내 앞에서 누가 핸드폰 보고 있으면, 그걸 보는 내 정신이 산만해져서 그래. 강의 듣기 싫으면 나가도 돼요. 언제든지. 아무렴. 그런 걸로 뭐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요. 그래, 옳지. 고마워요.”

   거기까지 듣고, 나는 MP3 파일을 중단시켰다. 대학교나 대학원 강의 시간 같았다. 위험과는 거리가 먼, 아주 먼 종류의 파일이었다. 이건.

   교수로 추정되는 사람 말투가 꽤 재미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자, 시작해 볼까. 슬슬 시작해 보죠. 근데 오늘, 우리가 실습하기로 했었나? 강의 계획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지? 그래, 근데 그런 계획 같은 건 싹 집어치우라구. 당신들도 이제 내 방식, 익숙하잖아. 그렇죠? 네, 좋습니다. 몇 사람만 고갤 끄덕거리네요. 나머지 분들, 교수 평가를 엉망으로 해도 좋아요. 그런 건, 아무 문제 되지 않아. 나는 내 방식대로 하겠어. 하던 대로 하겠어요. 그래, 내가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별 말 안 했었지. 오늘 강의는요. 한 가지 주제를 갖고 진행될 겁니다. 사랑. 우리, 사랑에 대한 얘기를 좀 나눠 봅시다.  음, 왜 갑자기 다들 눈알을 굴리지? 당신들은 자기 눈알 각자 굴리는 거지만, 그 모든 눈알이 다 같이 돌아가는 걸 보는 나는, 얼마나 무섭겠어요? 자, 자, 진정들 하고, 여길 봐요. 나를 보라구. 발표 시킬까 봐, 벌써부터 겁이 나요? 들여다보기 겁이 날 만큼의 사랑이라. 낭만적이군요. 여러분들 예상대로, 오늘은 여러분들 얘길 좀 들어 볼 겁니다. 많은 사람들 얘길 들으려는 게 아니에요. 나는 딱 한 사람을 지목할 겁니다. 그 사람의 사랑 얘길 들어 볼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3분을 줄게요. 오늘 발표를, 나는 죽어도 못한다, 싶은 분들. 여기서 나가도 좋습니다. 늘 말하지만, 나는 강의실 안 들어오거나, 중간에 강의실 나간다고 해서, 결석 처리 안 합니다. 그런 것들은 성적에 반영 안 해요. 조금도 안 합니다. 심지어 나는 그런 분들을 미워하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아, 네, 벌써 퇴장하시는 분들이 나오네요. 좋습니다. 정직하군요. 억지스럽게 마음과 말을 짜내는 것보다는, 네, 저런 모습이 훨씬 좋습니다. 음, 네, 그래서 오늘은, 아, 벌써 퇴장이 끝났습니까? 내가 바로 지목해도 됩니까? 어, 진짜 퇴장이 끝났나 보네. 신속해서 좋군요. 그래, 그럼 내가 지목하겠습니다. 음, 어디 보자. 누가 좋을까. 누구 눈빛이 제일 불안정한가. 거기, 거기! 네, 당신. 남색 모자 쓰고 있는 당신. 어딜 둘러 봐요, 이 강의실에 모자 쓴 사람, 당신뿐인데. 그래요, 이리 나오세요.”

   “아, 네.”

   “음, 좋은 목소릴 가지셨군요. 당신 눈빛이, 내 마음을 제일 강하게 이끕니다. 당신 얘길 들어야겠다는 마음의 소리를, 나는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어요. 당신과 눈길이 마주친 그 짧은 시간에, 내 마음이 참 많은 말들을 했습니다. 자, 여러분, 오늘은 이 분의 얘길 들어 보겠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김운호,입니다.”

   “운호. 아, 얼굴 생김새랑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그냥 어감이 그렇다는 소립니다. 나는 이름 뜻 같은 걸 정확히 추측해 낼 줄 아는 능력이, 없거든요. 조금도 없습니다. 헛소리가 길어지는군요. 자, 운호 씨. 운호 씨?”

   “네?”

   “왜 이렇게 얼어 있어. 여기서 나갈 참이었는데, 내가 붙든 건 아니죠?”

   “아, 아닙니다. 그냥 좀 떨려서.”

   “떨린다. 좋군요. 나는 그런 상태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보다 진실한 상태가 어디 있겠어요? 운호 씨. 지금부터 당신이 꺼내 놓을 이야기, 그 주제가 뭔 줄은, 알고 있죠?”

   “아, 네. 물론입니다.”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저 뒤에 앉은 몇몇 분들이, 따분해 하는 것 같거든요. 운호 씨한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했던 사람도 좋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그 사람을 사랑한다구요?”

   “네.”

   “아, 그럼 그 분과…….”

   “사귀는 건 아닙니다.”

   “음! 그걸 물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네, 사귀는 건 아니다. 좋아요. 사귀는 건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한 ‘사귄다.’라는 의미가, ‘연인이 된다.’라는 의미, 맞나요?”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오, 아주 흥미로운 대답이 나왔습니다. 나는 당신 대답이 뭘 뜻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직접 설명해 주세요.”





   “어, 근데요. 잠시만요. 그 전에 얘기 드릴 게 있어요. 사실, 제가 여기 나와서 발표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누가 발표하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겠지만요. 그냥 저는, 다른 사람들 사랑 얘길 좀 들어 보고 싶었어요. 제가 제 사랑 얘기를 하게 된다 해도, 뭐, 크게 상관은 없을 거 같았고. 그래서 계속 앉아 있었던 거거든요. 근데요. 제 사랑은, 진짜 희귀해요. 이상하고. 너무, 너무, 이상하고. 그래서 제가 약간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아! 여러분! 내가 아주 훌륭한 발표자를 골랐습니다. 아, 사실 나는 좀 긴장했었거든요. 사랑이 아닌 걸 사랑으로 착각한 사람이 여기 나와서, 재미라곤 쥐뿔만큼도 없는 가짜 사랑 얘기나 나불거릴까 봐. 근데 아니군요! 아, 마음이 놓입니다. 광기를 포함한 사랑, 그런 사랑 얘기가 나온답니다. 아, 미안해요. 운호, 네, 운호 씨. 말 끊어서 죄송합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아니, 근데요, 교수님. 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사랑은요. 표준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그런 사랑인데.”

   “이런! 아, 방금 욕이 나올 뻔했습니다. 아, 이런! 이런, 이런. 이런 썩어 빠진 사고방식이, 아직도 지구 위에 남아 있다니!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표준이라! 사랑의 표준이라! 운호 씨, 나는 운호 씨 머릿속을 열어 봐야겠습니다. 근처 대학병원에, 누가 전화 좀 해 주세요. 어서요! 실력 좋은 수술 팀 좀 불러 달라구요. 당장 운호 씨 두뇌를 절개하고, 그 머릿속으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나는요. 같이 들어가 볼 사람 있습니까? 두어 명 정도까지 받아 줄 수 있습니다. 같이 들어가서, 그 박물관 같은, 낡아 빠진 머릿속을 둘러보자구요. 이런! 사랑의 표준이라니! 사랑의 표준! 여러분, 내 입 좀 봐 주세요. 지금 내 입에서, 혹시 먼지가 나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의 표준! 사랑의 표준! 아, 운호 씨. 운호 씨를 놀리는 게 아닙니다. 단지, 나는 슬펐을 뿐이에요. 자, 이 정도 했으니, 운호 씨가 알아들었으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사랑에는 표준 따위가 없습니다. 네, 없고말고요. 사랑 그 자체는 그것일 뿐입니다. 사랑에 달리는 수식은 죄다 허상입니다. 아시죠? 사랑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건, 다 본인들 머릿속에서 나온 거예요! 자기 세계관을 사랑에다 끼워 맞추는 거라구요! 자, 음. 음, 음. 운호 씨. 네, 우리 운호 씨가 가슴을 열 준비를 다 마친 것 같군요. 계속 말씀해 주세요. 자꾸 말 끊어서 미안합니다. 다음 강의 시간부터, 발표자는 테이프를 하나씩 가져 오세요. 발표하기 전에, 그걸 내 입에 붙여야 할 겁니다. 순조로운 발표를 하고 싶다면요.”

   “아, 네. 그럼 그냥 얘기할게요. 2년 째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데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제 사랑은 되게 특이한데요. 그 사람은 제 존재를 몰라요. 저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그 사람은 모릅니다. 그 사람 이름은, 홍이현입니다.”

   “내 눈치 보지 말고, 계속 말해요.”

   “네. 어, 2년 전에요. 제가, 인터넷에서 어떤 글을 읽었어요. 뭐 검색하다가, 우연히.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 글을 쓴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홍이현. 그 글은, 그 사람이 자기 살아온 얘기를 쭉 써 놓은 거였습니다. 분량이 꽤 많았어요. 왜 그 사람이 그런 글을 썼는지는 몰라요. 그 글, 그 사람이 블로그 같은 데다가 직접 올린 글이 아니었거든요. 그 사람을 모르지만, 그 사람 글을 읽은 누군가가 그 글을 그냥 퍼 왔고, 그렇게 퍼온 형태의 글을, 제가 읽은 거죠. 아무튼, 그 글이, 좋았어요. 저는 그 글이 좋았어요. 처음에는 그냥 ‘와, 이 사람, 자기 삶에 되게 솔직한 태도를 가졌네.’ 싶어서, 좋았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한두 번 더 읽어 보려고, 읽고 배우려고, 제가 그 글을 제 블로그로 퍼 온 거거든요? 근데 그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글 너머에 있는 그 사람이 궁금했어요. 좋아서, 궁금했어요.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사실, 저도 이해가 어려운 부분인데요. 그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글을 쓴 홍이현이라는 사람이 좋아졌어요. 알아요. 제가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건, 그 글뿐이고,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그 사람은, 그 글로 한정되지 않는 존재라는 거. 그 글보다 몇 백 배는 더 풍부한 존재라는 거. 그걸 감안하고도, 그 사람이, 저는 좋았어요. 그런 제가 너무 납득이 안 돼서, 하루는 친구들한테 이 모든 걸 털어놨어요. 여러분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시겠지만, 제 친구들, 저한테 정신 나갔냐고 하면서, 펄펄 뛰더라구요. 아니, 정신이 이미 나가 버린 거라고. 자기들 주변에 있는 좋은 사람 소개시켜 줄 테니까, 망상에서 당장 빠져나오라고, 친구들이 저를 들들 볶았어요. 그 날 친구들이 저한테 그러더라구요. 그 홍이현이라는 사람 얼굴 생김새, 나이, 직업, 사는 곳, 그런 걸 다 알게 되더라도, 그 사람을 니가 좋아할 거 같냐고. 절대 아니라고. 니가 쫓고 있는 건, 홍이현이라는 사람이 아니라고. 니가 쫓고 있는 건, 홍이현이라는 이름표 달아 놓은, 가짜 홍이현이라고. 너는 지금 꿈꾸고 있는 거라고. 친구들한테 그 얘기 듣던 그 당시에는요. 친구들 말이 맞겠다, 싶었어요. 이러다 말겠지, 했어요. 그런데 이러다 말아지지가, 않더라구요.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그 사람이 가졌을지 모를 최악의 조건들을 가정한 다음에 그 사람 생각을 해도, 여전히 그 사람이 좋았어요. 알아요. 진짜 제대로 미친 소리 같은 거. 근데, 사실이 그렇더라구요. 그런 채로 2년을 보냈습니다. 여전히 저는, 그 사람 글을 읽으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 사람이 1989년에 태어났다는 것, 어렸을 때 계단에서 넘어진 상처가 무릎에 남아 있다는 것, 딸기를 좋아한다는 것, 한여름에 얼음 씹어 먹는 걸 좋아한다는 것, 바이올린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 한때 유람선 타고 세계 일주하는 게 꿈이었다는 것, 그런 것들을 되새기며, 하루를 보냅니다. 그 사람이 겪어 온 여러 가지 경험과, 그 사람이 좋아하는 여러 가지 장르를 두루 체험해 보며, 세월을 보냅니다. 그 순간들을 통해, 저는 잔잔한 행복을 느낍니다. 제가 언젠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 없다 해도, 오늘 충분히, 저는 행복합니다. 이 기상천외한 얘기를 끝까지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입니다.”

   거기서, MP3 파일 재생이 끝났다.    


   2년 전, 소포를 하나 받았다. 4년 전부터 2년 간, 홍이현을 좋아해 온 사람 목소리가 담긴, 소포를 하나 받았다.

   내가 그 홍이현이었다. 1989년에 태어난, 어렸을 때 계단에서 넘어진 상처가 무릎에 남아 있는, 딸기를 좋아하는, 한여름에 얼음 씹어 먹는 걸 좋아하는, 바이올린 음악을 좋아하는, 한때 유람선 타고 세계 일주하는 게 꿈이었던, 홍이현.

   그 사람이 읽은 그 글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내가 제출한 백일장 내용이었다.    


   그 MP3 파일을 들은 날, 나는 밤을 지새웠다. 그 글을 찾으려고. 그 글을 퍼 간, 모든 블로그들을 뒤져 보려고.

   그리고 2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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