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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pr 06. 2017

아무도 헤어지지 않는 이야기



   끝이 보이지 않는 숲과 야트막한 언덕들이 있는, 어느 곳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곳에 살던 작은 나무 한 그루와 새 한 마리의 이야기입니다.


   봄기운에 푸른색이 돌아, 모두가 여름을 예감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몸집이 작고 깃털이 샛노란 새 한 마리가, 조그만 나무 주위를 빙빙 돌며 날았습니다. 

   주위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왜소한 그 나무를, 새는 가만히 내려다보았습니다. 약간 움츠러든 기색이긴 해도, 땅으로 하늘로 힘차게 뻗어 나가는 나무가, 새는 대견했습니다. 안타깝지가 않고, 근사했습니다. 약간의 동질감과 은은한 존경심 같은 게, 새의 마음을 휘저었습니다.


   이윽고, 나무의 가장 굵은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새가, 나무에게 인사했습니다. 나무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새가 다시 말했습니다. 또 놀러 와도 되겠느냐고. 나무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새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더니 하늘로 훌쩍 날아올랐습니다. 

   새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새가 보인 태도 때문에, 나무는 적잖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새와 사귀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나무에게, 새의 자유분방한 태도는 다분히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나무는 새에게 말 걸지 않고, 새의 뒷모습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았습니다. 

   새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마음이 조금 들뜬 것 같다고, 나무는 생각했습니다. 새가 앉았다 간 그 나뭇가지에 남은 새의 느낌을, 나무는 가만히 되새겼습니다.





   그 다음 날, 새가 다시 나무에게로 왔습니다. 나무가 새를 조용히 반겼습니다. 나뭇가지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새가 재잘재잘 떠들었습니다. 요점도 없고 맥락도 불분명한 그 이야기를 차분히 들으며, 나무는 잔잔히 흔들렸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새롭게 밀려오는 마음에 흔들렸습니다.

   나무가 그토록 우직해서, 새는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꼈습니다. 나무와 사귀어 본 적이 한 번도 없기는, 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관심 받기 위해서는 뭔가를 쉼 없이 주절대야 하는 자신의 세계와 나무의 세계가 너무도 달라서, 새는 조금 의아했습니다. 앞 다투듯 말을 꺼내지 않고, 자신이 말할 때 가만가만 들어 주는 존재를 처음 만난 새는, 자꾸 나무를 힐끔거렸습니다.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차분히 안아 주는 나무가, 새는 의아했습니다. 그 의아한 느낌 때문에, 새는 떨었습니다. 그 떨림 때문에, 새는 나뭇가지를 더 세게 움켜잡았습니다. 그 의아함과 떨림이 내일까지, 모레까지, 그 이후까지 계속 이어지기를, 새는 가만히 바랐습니다.    





   완연한 여름이 되었습니다. 키가 좀 더 자라고, 몸체가 좀 더 두꺼워진 나무와 새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숲과 언덕들과 하늘과 구름과 강과 바람은 알고 있었습니다. 나무와 새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나무와 새가 그 사실을 마침내 알아차린 건, 알아차린 그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인 건, 가을이었습니다.

   나무가 새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습니다. 내 안에서 살아 달라고. 아니, 내 안에서 살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고. 아니, 내 안에서 살고 싶으냐고. 아니, 네가 내 안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아니, 아니,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말하려던 게 아니라고.

   그 장황한 말을 들은 새는 오래 웃었습니다. 그러더니, 어딘가로 말없이 날아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새의 부리에는, 자잘한 나뭇가지들이 물려 있었습니다. 새는 그것들로 둥지를 지었습니다. 나무에. 나무 안에.    


   계절이 순환하고, 다시 봄이 왔습니다. 

   그런데 새의 표정이 예전처럼 환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한 새의 표정 때문에, 신경이 이만저만 쓰이는 게 아니었지만, 나무는 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더는 기뻐 보이지 않는 새에게 뭔가를 물어 보기가, 겁났던 것입니다. 새에게서 돌아온 대답이, 둘 사이를 끊어 놓을까 봐, 나무는 두려웠습니다. 누구보다 새가 걱정됐지만, 새가 갖고 있을 고민을 직접 확인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나무에게, 어느 날, 바람이 찾아왔습니다. 먹이를 찾기 위해, 새가 잠시 자리를 비운 때였습니다. 

   바람은 무엇도 에둘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담백한 어조로, 바람이 말했습니다. 새는 자유를 원한다고. 그게 새의 본성이라고. 그 본성이 지금 억눌려져 있다고. 너에 대한 사랑 때문에, 새가 자기 본성을 자꾸 억압하고 있다고. 네가 정말 새를 위한다면, 새에게 자유를 되돌려주는 게 어떻겠냐고. 말을 마친 바람이, 순식간에, 저편 언덕으로 불어갔습니다. 뭔가에 난데없이 얻어맞은 듯한 기분으로, 나무는 멍해져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습니다. 나무가 새에게 물었습니다. 가고 싶은 데 없느냐고. 그 질문을 받은 새가, 나무에게 되물었습니다. 왜 그런 걸 묻느냐고. 

   잠시 침묵한 나무가 새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원하는 곳이 있다면, 그리로 얼마든 가도 좋다고. 나는 너를 갖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너를 사랑할 뿐이라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네가 언제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그 바람은 언제까지나 유효할 거라고.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네가 나로 인해 불행해지는 게, 내겐 더 슬픈 일이라고. 그러니 네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가도 좋다고. 언제든, 괜찮다고.

   나무의 말을 들은 새의 눈빛이 얼어붙었습니다. 새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갈등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챈 나무가 혼자서 얼마나 근심했을지, 도무지 가늠 되지 않아서, 새는 눈앞이 아득했습니다. 사랑으로 내린 선택이, 사랑하는 나무에게 오히려 상처를 준 것 같아, 새는 막막했습니다.

   그 어느 곳으로도 떠나지 않겠다고, 새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무는 새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나무는 완강했습니다. 네 마음이 즐거워지는 순간을 따라 가라고, 나무는 되풀이해서 말했습니다. 

   결국 새는 순순히 털어놓았습니다. 모든 걸 털어놓았습니다. 가 보고 싶었던 어떤 곳에 대해. 나무 곁에 있는 한, 그 소망을 이룰 수 없다는 데서 온, 좌절감에 대해. 이따금 나무를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 것으로 인한, 죄책감에 대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생생히 살아 있었던, 나무를 향한 사랑에 대해.

   그 모든 이야기를, 나무는 침착하게 들었습니다. 새를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그로부터 사흘 뒤, 새가 나무를 떠났습니다.    


   바람이 나무에게, 새의 소식을 드문드문 전했습니다. 바람이 새에게, 나무의 소식을 드문드문 전했습니다. 서로의 소식을 간혹 전해 들으며, 나무와 새는 조용히 안도하거나, 남모르는 그리움에 사무쳐 하거나, 며칠 잠을 못 이루거나, 홀로 흐느끼거나, 가만히 기도했습니다.


   서로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나 완전히 단절된 건 아닌 그 날들은, 나무와 새의 마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여행해 보고 싶었던 그곳에 도착한 새는, 잔뜩 쌓여 있기만 한 소망을 해결한 새는, 그 소망 뒤에 가려져 있던 사랑을 똑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새를 떠나보낸 나무는, 새와의 관계에 대한 소유욕으로부터 물러난 나무는, 그 소유욕 밑에 깔려 있던 사랑을 똑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아닌 것들에 사로잡혀 있느라, 변질되거나 흩어진 줄 알았던 사랑을, 똑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생겨난 첫 순간처럼 환하고 따스하게 존재하는 사랑을, 똑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계절이 순환하고, 다시 봄이 왔습니다. 

   나무의 품속에 새로운 둥지가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 둥지가 또 다시 비워질 수 있을 것임을. 하지만 아무것도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둥지가 얼마든 만들어질 수 있을 것임을, 더불어 알았던 까닭입니다. 모두가 그것을 알았던 까닭입니다. 

   그 앎으로 가득한 그곳에 상처가 비집고 들어올 틈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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