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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y 06. 2017

부끄러움의 이력



   어디서 음악소리가 들려오기만 하면, 그 사람은 춤을 추었다. 살짝 접은 팔꿈치를 몸 앞으로 내민 뒤, 발걸음에 맞춰 그것을 흔들었다. 각기 다른 각도로 구부러진 그 사람 손가락은 부드러운 곡선을, 때로는 원을 그렸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하듯, 둥글게 모으고 있거나.

   하루는 그 사람이 “부끄럽죠?” 하고 물어 왔다. 횡단보도 건너편 신발 가게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에 맞춰 춤을 다 춘 뒤, 내 쪽으로 돌아서면서. 

   나는 “뭐가?”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내가 남들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길가에서 느닷없이 춤추거나 할 때, 부끄럽지 않냐구요. 일행으로서.” 하고 대답했는데, 그때 그 사람 눈동자 빛깔이 약간 탁해진 것 같았다. 

   그 사람 눈빛 변화가 마음에 걸린 나는 “왜, 누가 부끄럽대?” 하고 묻다가, 어쩐지 그 질문이 그 사람의 실제 기억 하나를 무례하게 건드리는 것 같아, “아니, 난 안 부끄러운데.” 하며, 얼른 말을 돌렸다.

   “안 부끄러우면, 음, 어떤 생각 드는데요?”

   “어떤 생각이라니?”

   “내가 아무데서나 춤출 때, 어떤 생각해요?”

   “딱히 어떤 생각을 하는 건 아닌데, 그냥 좋아 보여.”

   “좋아 보여?”

   “응, 난 그렇게 못하거든.”

   “그렇게 못한다.”

   “응, 알잖아, 난 그렇게 못하는 거.”

   “전에 한 번 따라 추더니.”

   “내가?”

   “네, 그때, 다리 위에서.”

   “다리? 다리 위에서?”

   “술 깨야 된다고, 산책하자고, 나 데리고 나갔던 날 밤에요. 기억 안 나요? 그 날, 우리 옆 동네까지 걸었는데, 거기 다리 하나 있었잖아요. 커다란 강 가로지르는 다리. 다리에 세워진 가로등에 스피커 설치돼 있었고, 거기서 시끄러운 노래 나왔고, 나 춤 췄고, 당신도 따라 췄고. 당신 그 날 되게 귀여웠는데. 춤도 귀여웠지만 표정이 너무 귀여웠어.”

   “거기까지 걸어가 놓고도, 술이 덜 깼었나 봐. 기억이 안 나, 난.”

   “음.”

   “안 부끄러워.”

   “응?”

   “내가 널 왜 부끄러워해.”

   “혹시나.”

   “자기랑 다르다고 다른 사람 부끄러워하는 거,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야. 나도 그 토 나오는 겁쟁이로 너무 오래 살았지만. 이젠 아니야. 아니, 아니길 바란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뭐?”

   “대답하기 좀 그러면, 대답 안 해도 돼요. 알았죠?”

   “응.”

   “그 겁쟁이 시절에, 제일 부끄러웠던 사람이 누군데요?”

   “음.”

   “실례되는 질문이죠?”

   “아니, 내 가족들.”

   “응?”

   “가족들. 난 내 가족들을 제일 부끄러워했어. 내 가족들이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거든. 나는 하나도 안 구질구질하고, 내 가족들만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어. 사실 제일 구질구질했던 건 나인지도 모르는데. 이상해. 그때 다른 가족들은 모조리 깨끗하고, 멋지고, 아름답고, 이상적으로 보였거든. 내 가족들은 암만 봐도 괴상하고. 그래서 나, 가족들이랑 어디 가는 거 진짜 싫어했어. 친구들한테 내 가족들 소개시켜 주고 나면, 아니, 내 가족들 들키고 나면, 왠지 친구들이 나한테 실망하거나, 조만간 친구들한테 따돌림 당할 거 같은 기분도 들었고. 다른 가족의 가난은 소박함이나 아담함으로 바라보면서, 내 가족의 가난은 그렇게 바라봐지지가 않더라. 숨기고 싶었어. 도망치고 싶었어. 지긋지긋했어. 그 속에서 이렇게 무사히 커 놓고, 배은망덕하게, 나는 그랬어. 나 부끄럽지?”

   “아, 왜 그래요. 아니야. 안 부끄러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전혀 안 부끄러워. 나만 부끄러워. 내가 너무 부끄러워. 어디 내놓기가 무섭다.”

   “아니야, 그러지 마. 내가 괜한 걸 물었네. 미안해요. 나 좀 봐. 잠시 서 봐요. 내 얼굴 좀 보라구. 응?”

   “이런 얘기 처음 하는 거라, 좀 어색하네. 이런 얘기는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고. 그냥 계속 걷자.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으면, 나, 좀, 울 거 같아. 슬픈 건 아닌데, 마음이 그래. 울렁거려. 그래서 마주 보는 거 못하겠어.”

   “그러니까 서 보라구. 그러라구. 울든지 어쩌든지, 그러라구요. 내 앞에서 그러라구요. 당신, 나 말고 누구한테 가서 그럴 건데? 나 싫어. 나 말고 다른 사람 앞에서 당신 이런 표정으로 서 있는 거, 나는 싫어. 내 앞에서 다 해요. 나하고 하라구요.”

   “너한테 아니면, 이런 얘기 꺼내지도 않아. 너 없는 데서 이런 표정으로 서 있을 일 같은 거, 없어.”

   “아무튼, 말 돌리지 말구요. 겨우 꺼내 놓은 감정, 다시 삼켜내지 말라구요.”

   “이러려고 너 만나는 거 아니야.”

   “이럴 각오도 안 하고, 나 만나려고 한 거야?”

   “이럴 각오라니?”

   “자꾸 말 돌린다.”

   “어려워.”

   “뭐가.”

   “이런 거. 내 안에 있는 쓰레기장 보여 주는 거.”

   “말 참 예쁘게도 한다. 누가 쓰레기장이래요?”

   “지금이야 니가 나 사랑하니까, 이런 내 단점도 그냥 괜찮아 보이겠지. 근데 나중 돼서 지금 순간 되돌아보면, 너도 나 부끄러워질 거야.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어질 거야.”

   “아니야. 아니라구요. 지금 나한테 시비 걸어 봤자야. 나는 거기 걸려들 생각 없거든. 계속 말해 줄까요? 나는 당신 안 부끄러워. 내가 아니면 된 거야.”

   “그래.”

   “울어도 되지만, 억지로 울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울어 달라고 하는 게 아니야. 그냥 이렇게 잠시 멈춰 있자구. 같이. 당신 속에서 나온 이런 감정, 다시 당신 안으로 허겁지겁 밀어 넣고 싶지가 않다구요, 나는. 그리고 그게 뭐가 어때서? 나 길거리에서 춤추는 거, 안 부끄럽다고 했죠? 그거랑 이거랑 뭐가 다른데? 길거리에서 춤추는 게 내 한 부분이듯, 그것도 그냥 당신 부분이잖아요. 부끄럽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나한테는 그렇게 너그러우면서, 자기한테는 손톱만 한 마음도 안 내 주는 것 좀 봐. 지독해,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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