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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y 05. 2017

흑맥주만 마시는 사람



   우리 가게에서 그는 항상 흑맥주를 시킨다. 딱히 선호하는 맥주 브랜드가 있는 건 아닌 모양인지, 문을 열고 들어오며 “흑맥주요.” 하고 주문한 뒤,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뿐이다. 

   내가 캔 안에 든 흑맥주를 가져다주든, 병 안에 든 흑맥주를 가져다주든, 그는 개의치 않는다. 자기 몫의 흑맥주를 느리게 홀짝거리며, 캔이나 병 둘레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한다. 

   목요일이나 금요일에는 그의 주문이 한 번 더 들어오곤 한다. 두 번째 주문 내역도 역시 흑맥주다. 안주는 거의 시키지 않는다. 시켜 봐야, 땅콩이나 과일 정도다. 그런 그에게 나는 가끔 배를 채울 만한 안주를 서비스로 내어 주는데, 그 서비스 안주를 먹고 난 그는 그 값까지 반드시 치르고 돌아간다. 내가 돈을 받지 않으려고 해도 소용없다. 그는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돈을 두고 간다. 아무런 말없이. 

   맥주 두 병을 다 마셔도, 그의 눈동자 초점은 풀리지 않는다. 조금도. 뺨도 붉게 달아오르지 않는다. 걸음걸이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런 걸로 봐서, 그의 주량이 약하지는 않은 듯한데, 그가 맥주를 두 병 이상 마시는 일은 없다. 음주에 대한 개인적인 규칙일까. 아니면, 정신은 술에 취해도 몸을 움직이는 데는 아무 문제없는 특이 체질을 가진 걸까.    




   처음에 그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나타났다. 요즘 그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온다. 내게 눈인사 비슷한 것도 건넨다. 어느 날에는 그가 주문하기도 전에 내가 “흑맥주요?” 하고 물었는데, 그때 그가 약간 웃은 것 같기도 했다. 홀 조명이 어두워서 그의 표정을 정확히 식별하긴 어려웠지만.

   하여간 그는 참 독특한 사람이다. 인기척이라 할 만한 것도 내지 않고 돌아다니며, 말수도 극도로 적은데, 나는 여느 손님들보다 그에게 더 큰 신경을 쏟게 된다. 내가 독특한 사람인 건가.    


   두 달 전쯤에는 어떤 젊은 여자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 여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문득 조심스러운 기색이 된 그 여자는, 혹시 말을 못하는 거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갤 휘휘 내저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약간의 모욕을 당한 얼굴로 자리를 옮겼다. 약간의 모욕을 당한 얼굴은 그의 목 위에도 달려 있었다. 귀중한 뭔가를 침해당한 눈빛으로, 그는 가게 문을 나섰다. 그가 마시던 맥주는 반이나 남아 있었다. 그가 맥주를 남기고 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작은 룸 하나를 매일 비워 두었다. 그리고 그가 올 때마다, 그를 그리로 안내했다. 특별한 단골에 대한 내 나름의 배려 조치였다. 여긴 손님이 매일 북적거리는 유명 맥줏집이 아니라서, 룸 하나 비우는 게 대수는 아니었다. 

   내가 그를 계속 룸으로 안내하자, 그는 “이런 공간은 저 말고 좀 더 많은 손님들한테…….” 하고 어물거렸는데, 내가 아무 대답 없이 메뉴판을 내밀자, 그도 입을 꾹 다물고 신발을 벗었다.    





   우리 맥줏집이 그에게는 어떤 피난처 같아 보여서, 그래서였던 것 같다. 내가 그에게 좀 더 많은 마음을 쓰게 된 건. 대포알에 맞아 몸 어느 부위가 날아가 버린 것처럼, 마음의 어느 부위가 크게 훼손돼 버린 듯, 어딘지 너덜너덜하고 쓰라리고 허전한 느낌을 풍기는 그를, 못 본 듯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침묵에도 무게가 제각각이다. 내가 만난 침묵 가운데 가장 무거운 침묵을 안고 들어온 그를 맞닥뜨린 순간, 수천 년의 울음보다 더 거대한 슬픔이 나를 뒤로 퍽 넘어뜨리는 것 같았다. 깨진 뒤통수 구멍으로 눈알이 빠져 나간 것처럼, 눈앞이 잠시 아득했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세상에 대한 마지막 끈 하나만 간신히 붙들고 있는 한 인간을 마주한 또 다른 인간의 본능적인 보호 본능 같은 게, 내 안에서 솟구쳐 올랐던 건.

   이 모든 게, 그에 대한 내 지독한 오해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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