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편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이로운 May 10. 2017

순간 여행자의 기록

   헌책방이 잔뜩 늘어선 골목을 걷고 있던 중이었다. 골목 끄트머리 쪽에 자리 잡고 있던 헌책방 안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앞으로 가 보았다.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낡은 나무 책장을 뜯어내고 있었다. 헌책방을 곧 철거시킬 모양이었다. 나무껍질 색깔처럼 바래진 헌책들이 헌책방 앞에 쌓여 있었다. 가지런히 쌓여 있는 게 아니라,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어지러운 책 더미에서 시선을 떼려던 찰나였다. 『순간 여행자의 기록』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시간 여행자도 아니고, 순간 여행자?

   책장 분해에 열중하고 있는 헌책방 주인을 한번 힐끔댄 나는 『순간 여행자의 기록』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너무 낡아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페이지들이 다 떨어져 나올 것 같은 책이었다.    


   「내가 거쳐 온 모든 환생에 대한 기억이 하루아침에 되살아났고, 나는 순간 여행자가 되었다.」

   차례가 있을 줄 알았던 책의 맨 앞장에 적혀 있는 문장이었다. 

   “학생, 책 사게?”

   팔을 최대한 몸 밖으로 뻗어, 시커먼 목장갑을 벗으며, 헌책방 주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기침 참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까 옆모습만 봤을 때는 몰랐는데, 그는 때 묻지 않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어느 순간부터 전혀 나이 먹지 않은 듯한 눈빛. 명랑함을 훼손당하지 않은 눈빛. 그 눈빛과 그의 흰머리는 뜻밖에 잘 어울렸다. 멋스러웠다.

   주인의 그 말소리에 화들짝 놀란 내가 얼결에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빙긋 웃으며 “장사 안 하는데. 이제 못하는데. 그 책 사려던 거였음, 그냥 가져가.” 하고 말했다. 그런 뒤, 그는 바지 주머니에 끼우고 있던 고무장갑을 꺼내 들었다.    


   골목을 빠져나온 나는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그런데 햇살이 너무 따가워서, 책을 읽기가 어려웠다. 덥기도 더웠지만, 종이가 햇살을 반사하는 바람에 눈이 시큰했던 것이다.

   그래서 버스 타고 난 뒤에 책을 읽으려 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퇴근 시간도 아닌데, 버스 안은 승객들로 가득했다. 교복 입은 애들이 주된 승객이었다.     


   결국 내가 책을 다시 펼쳐 든 곳은 내 방 책상 앞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모든 생애에 대한 모든 기억의 부활로 인해 너무 혼란스러워서, 나는 내게 순간 여행 능력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두통에 시달리다가 잠들기를 사흘 내내 반복한 후에야, 내 시야에 이상한 뭔가가 잡히고 있다는 걸 알았다.

순간들이 보였다. 손바닥만 한 화면이 수없이 늘어선 형태로 순간들이 보였다. 그 화면 속 모든 순간들은 저마다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내 의도에 따라 특정 순간들을 눈앞에 불러올 수 있었다.

나는 불러온 순간의 모든 구역을 마음대로 볼 수 있었다. 빠른 속도로 볼 수도 있었고, 느린 속도로 볼 수도 있었고, 정지 화면으로 볼 수도 있었다. 내가 보고 싶은 방식이 뭐든, 바로 그 방식대로 볼 수 있었다. 제한 같은 게 없었다. 

처음에 나는 이런저런 순간들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불러와서 들여다보고, 불러와서 들여다보고. 그러다가 하루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 화면을 만지려 했는데(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그 화면을 정말 만질 수 있다는 걸 몰랐다), 내 손끝이 그 화면에 닿자마자 나는 그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순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내 외모가 갑자기 바뀌거나, 내가 투명인간으로 변하는 건 아니었다. 순간 속에 사는 사람들도 나를 볼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몇 백 년 전의 순간으로 들어간 건 아니어서, 내 옷차림이나 머리스타일이 그 순간 사람들에게 놀람을 주지는 않았다. 

내 첫 순간 여행의 도착지는, 내가 일곱 살이었던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생애를 살고 있는 내가 일곱 살이었던 순간. 

그 순간의 공간적 배경은 바닷가였다. 나는 바닷가 바로 뒤에 놓인 슈퍼 앞에 서 있었고, 100m쯤 앞에 일곱 살의 내가 있었다. 일곱 살의 나는 외삼촌 손을 잡고 있었다. 뭘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세 번째 순간 여행 때부터, 나는 내 외모를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여섯 번째 순간 여행 때는 투명 인간이 되었다. 주문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내가 명확히 원하기만 하면.」

  「순간 여행이 끝난 다음, 내가 돌아올 순간도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순간 여행이 가능해진 그 순간, 내가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걸. 나는 모든 순간을 돌아다닐 수 있었고, 거기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이번 생애는 이번 생애대로 진행되고, 나는 나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번 생애와 내가 분리된 것이다.

아니, 나는 죽음에서 벗어난 게 아니었다. 한 생애가 죽어도, 죽지 않는 내 본질을 발견한 것일 뿐이었다. 영혼이라고 할까, 그런 걸 발견한 것이다. 형체는 없지만, 모든 형체가 될 수 있는 영혼 내지는 의식을 발견한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수없이 죽어 왔다는 것을. 

죽음이라는 게 어떤 건지 궁금했던 나는, 내가 죽게 되는 순간들로 몇 번 들어가 보기도 했다. 이번 생애의 생김새를 하고 있지 않은 내가 죽는 모습이라 그런지, 내 죽음들을 바라보는 일이 크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 죽음 자체가 비극처럼 보이지 않은 까닭에, 죽음을 담담히 응시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죽음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각각의 체험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가장 아름다웠던 생애는 1800년대를 살았던 생애였다. 뭐랄까, 그때를 살던 나는 그 이전의 나보다 훨씬 똑똑했으며, 1900년대의 나나 2000년대의 나보다는 덜 약아서, 가장 아름다웠다. 

어리석지 않은 순수의 시대였다. 

1700년대 후반에 한 번 태어나 살고, 1800년대 중반에 한 번 더 태어나 살았으므로, 1800년대에 나는 총 두 번의 생애를 경험했다. 한 번은 여자로 태어나고, 한 번은 남자로 태어났다.」

  「참 신기한 게, 나는 대체적으로 비슷한 사람들을 사랑했다. 얼굴이나 성별은 계속 바뀌었어도, 내가 사랑한 모두는 저마다 닮은 구석을 공유하고 있었다. 풍기는 느낌이 닮았던 것이다.

나는 똑같은 영혼을 계속 사랑한 걸까?」

  「그리고 1200년대의 생애부터 나는 계속 예술 관련 직업을 가졌다. 음악, 미술, 문학 순으로. 영혼에도 취향이 있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 나는 나와 같은 순간 여행자를 만났다. 그는 곧 지구를 떠날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이런저런 얘기를 건네주었다. 

“당신도 곧 지구를 떠나게 될 거요. 지구에서의 모든 배움을 끝으로 얻는 게 순간 여행 능력이고, 우리는 그 능력을 갖고 지구에서의 생애를 몽땅 곱씹은 뒤에, 새로운 행성 또는 새로운 차원으로 가게 되는 겁니다. 얼떨떨한 표정 짓고 있는 거 보니, 아직 지구 이전의 생애에 대한 기억은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군.”」    

   거기서 책이 끝난다. 강제로 끝나 버렸다. 그 뒷부분이 어딘가로 찢겨져 나가 버린 까닭이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순간 여행자의 기록’을 검색해 보았지만, 이 책에 대한 정보는 단 한 줄도 나와 있지 않았다.    


   소설이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났더니, 그 순간 여행자를 찾고 싶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찾으면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너무 강렬했던 나머지, 마치, 내가 그 순간 여행자 생애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카쿠코 매거진 : http://cacuco.modoo.at/




매거진의 이전글 부끄러움의 이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