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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n 20. 2017

망설임 없이 받고 뒤끝 없이 끊는

   여보세요? 채영아, 응. 웬일이야, 아침부터. 응? 어딜? 거길 간다고? 갑자기 거긴 왜? 너 무슨 사고 쳤니? 그런 질문이 어디 있긴, 여기 있지. 채영이 너 평생 사근사근하게만 살았잖아. 이제 사고 한 번 칠 때도 안 됐니? 그러고 속 한 번 풀어야지. 너라고 속에 엉킨 게 왜 없겠어. 그래, 알았다, 알았다. 기지배 정색하긴. 니 얼굴 여기서도 다 보인다, 이 기지배야. 근데 이거 농담 아니다? 사고 한 번씩 친다고 너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어. 뭐라 한들, 어쩌겠어? 이미 친 사고를? 게다가, 사고 쳐 놓은 다음에 니가 뒷수습을 오죽 잘하겠니. 그런 마당에 뭐가 걱정이야. 좀 막 살아도 보고 그래! 너 보면 너무 쫀쫀한 니 인생 보여서, 나 가끔 막 갑갑하다? 혹시나 너 사고치고 갈 데 없으면 우리 집으로 와. 몇 달이고 흔쾌히 재워 줄 테니까. 난 아주 잔치라도 열 거야. 응? 잘 안 들려. 아, 터미널. 버스 시간 몇 시라고? 아직 좀 남았네? 근데 거기까지 가려면, 버스 안에서 꼬박 3시간은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밥은 먹고 가는 거야? 야, 너한테는 김밥 못 먹어 죽은 귀신이 수백 명은 들러붙었냐? 집에서 그렇게 지겹게 만들어 먹었음 됐지, 뭘 또 사 먹기까지 해? 맛은 좋디? 너도 참 너다. 어떻게 넌 취향이라는 게 조금 변하지를 않니? 아주 박제 수준이야. 변덕도 없고 늘 곧고, 그런 너 보다가 내 마음 아슬아슬해지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러다가, 저렇게 똑바르기만 하다가, 언제 한 번 꺾어지나, 싶어서. 아, 알겠다구, 알겠다구. 그만한다구. 알아, 나도. 너한테는 맨날 부서지는 내가 갑갑한 년이라는 거. 누가 모르니? 근데도 우리는 참 죽이 잘 맞아요. 뭐? 안 맞아? 난 아직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안 맞았대? 그래, 좀 웃어라. 너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나한테 전화한 거 알아? 어디 헐값에 팔려 가는 사람 목소리 같았다구요. 근데 또 내가 너 수상하다고, 무슨 일 있는 거 같다고 하면, 너 성가실 거 같아서, 안 묻는다. 그래, 안 물어. 벌써 니 심기 많이 건드려 놓은 것도 알아. 근데 그게 내 역할인 걸 뭐 어떡해? 무슨 역할이긴? 니가 니 생활에 틀어박혀 굳어질 때마다, 한 번씩 너 내동댕이  쳐 주는 게 내 역할이지. 나는 요란하게 그 역할 수행하고, 넌 조용하게 그 역할 수행하고. 원래 정반대인 사람들끼리 같이 지낸다는 게, 뭐 그런 거 아니겠어? 응? 흥수? 내 동생? 걔는 왜? 흥수 친구 누구누구 있는지 내가 어떻게 다 알아? 나, 그렇게 살가운 누나 아니잖아. 왜, 흥수 친구 걔가 마음에 들디? 아닌데 왜 물어 봤어? 아닌데 왜 발끈해? 야, 채영아, 넌 이런 게 매력이야. 뭐 다 알고, 뭐 다 다스리는 척하면서, 어딘가 어설픈 거. 귀엽잖아. 그런 거에 껌뻑 죽는 사람 많다? 절대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거 같은 사람한테서 보이는 빈틈이 얼마나 매력적인데 그래! 야, 누가 너 시집가래? 그냥 그렇다고! 아, 너 오늘 왜 그러냐? 좀 까칠하다? 알았어, 알았어. 흥수 요새 회사 다녀. 응, 농담 아니야. 니가 왜 울려고 그래? 흥수 니가 키웠니? 음, 그렇게 큰 회사는 아닌데, 지가 몇 년 동안 들어가고 싶어 했던 회사래. 뭐라더라, 뭘 만드는 회사라고 했는데, 갑자기 말해 주려고 하니까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흥수 걔, 맹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지 딴에는 하고 싶은 게 있었더라. 근데 채영아, 나 그 날 진짜 놀랐어. 아, 흥수 걔가 취직했다는 소식 전해 주던 날.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구두 한 짝 벗기도 전에 흥수가 “누나? 누나!” 하고 부르는 거야. 화장실에서 똥 누다가 없는 휴지 찾는 애처럼 급하게. 그래서 뭔가 싶어서 두리번거리는데, 화장실에서 흥수 걔가 뛰쳐나오더니, 다짜고짜 나를 부둥켜안네? 키는 멀대 같이 커 가지고 나를 허공에서 휘휘 돌리는 거야. 밥 많이 먹고 들어간 참이라 속도 더부룩한데. 그래서 나는 짜증냈지. 이 새끼가 미쳤나, 하고. 근데도 흥수 걔는 계속 웃기만 하는 거야. 평소 같았음 얻다 대고 이 새끼 저 새끼냐 하면서, 한 번만 더 이 새끼라 그러면 누나 뱃속에 들어가서 누나 배 다 늘어지게 만들 거라고, 막 대들었을 텐데. 나한테서 손 뗀 다음에 흥수가 “누나! 나, 붙었어! 붙었어! 나, 이제 회사 가! 거기 가!”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대? 근데 걔가, 흥수 걔가, 갑자기 주먹 안쪽으로 지 가슴팍을 퍽퍽 쳐대다가, 금방 친 부분 옷을 찢어 버릴 듯이 쥐어뜯다가, 말하는 법 잊어버린 사람처럼 계속 아, 아, 그러다가, 급기야는 주저앉아서 엉엉 울기 시작하는 거야. 걔가 우는 거야. 아빠한테 뺨 맞던 날에도 눈썹 한 번 안 모으던 걔가! 애처럼 콧물이고 침이고 질질 흘리면서! 그러다가 갑자기 하는 말이 뭔 줄 알아? “아, 씨. 이제 명절 날 아빠랑 엄마랑 누나랑 전부 고개 들고 밥 먹을 수 있겠다.” 그러는 거예요. 내 참……. 그 말 듣고 헛웃음이 막 나오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눈물이 핑 돌대. 흥수 걔가 맨날 흐리멍덩하게 돌아다녀도, 지 때문에 지 식구 욕볼 때마다 어지간히 속상했나 보더라. 그게 너무 기특한 거야. 그렇게 상한 속 어디 한 번 안 비추고 혼자 삭혔을 거 생각하면, 딱하기도 하고. 실은 그렇게 막, 우리가 명절마다 지 때문에 어디 가서 푸지게 욕먹고 그러지는 않았거든? 나이 지긋한 분들하고 같이 둘러앉아 있을 때 “니들은 흥수 안 챙기고 뭐했냐? 애가 저 지경으로 멍하니 나이만 들도록…….” 하는 잔소리 들은 정도? 근데, 뭐 그 정도 잔소리 오가는 건,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 아니야? 아, 막말로 자기가 흥수 먹이고 입히고 재울 것도 아닌데, 암만 친척이라 해도, 흥수 두고 훈수 두는 데 한계가 있잖아. 아무튼 나는 그랬어. 명절 때 흥수 얘기 나온 거 때문에 그렇게 크게 불편한 적 없었거든. 또 내가 크게 불편할 때 가만히 있는 인물도 아니잖아. 근데 나 무슨 얘기하다 이 얘기하니? 너 화장실 가야 되는 거 아니야? 중간에 휴게소에서 버스 서니? 나도 버스 타고 어디 멀리 훌쩍 떠나 보고 싶다. 응. 그래, 그래. 응. 아무튼 너, 다녀와서 얘기해 줘. 그 속에 뭐가 있는지. 알았어. 입 딱 닫고 니 얘기 듣기만 할게. 그래, 또 통화하자. 응. 응.




산문집 《각자의 한결같음》 : http://www.bookk.co.kr/book/view/19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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