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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n 22. 2017

신종 상사병인지

   아래로 내려갈수록 옆으로 퍼지는 짙은 파란색 치마를 입고, 허리에는 치마 색이랑 똑같은 끈 하나를 동여매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웃을 때마다 고개가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꺾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에 땀이 많이 나는 편인지, 사람들 시선이 자신을 떠날 때마다, 몸 옆쪽으로 손바닥을 팔락거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면 소재로 된 검은색 가방 밖으로, 이어폰 한 쪽을 빼 놓고 다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길을 걷다 문득, 가방 속 내용물을 뒤적여 보곤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숟가락을 중지와 약지 사이에 끼운 채로, 천천히 국을 떠먹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숟가락은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으면서, 젓가락은 꼭 밥그릇 위에 얹어 놓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펜을 잡을 때는, 엄지손가락 안쪽으로 검지손톱을 꽉 감싸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날과 팔꿈치에 붙어 있는 살구색 고무반창고 쪽이 가려운지, 그곳을 틈틈이 문질러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면, 턱밑에 주먹을 가져다 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컵이나 병에 든 물을 삼킬 때마다,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꾸깃꾸깃 접은 종이 같은 걸 지갑 속에 넣고 다니며, 한 번씩 그걸 꺼내 읽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감정이 어딘가로 미끄러질 때면, 버릇처럼 고개를 떨어뜨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그곳에, 그런 모습으로, 당신이 있었습니다. 이게 당신의 첫인상입니다. 3년 전 어느 날입니다. 어제 만난 친척들 겉모습보다 더 생생한 당신의 찰나들입니다.
   이상해요. 내가 당신의 모든 걸 이렇게 뚜렷이 기억하는 건 아닌데, 당신 처음 만난 그 날 당신 모습만큼은 어쩜 그렇게 구석구석 다 기억하는지. 당신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나 봐요. 당신이랑 같이 보낸 하루 동안, 당신만 힐끔대고 있었나 봐요. 그 날의 기억을 구성하는 모든 장면의 한가운데 당신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호감이 간다거나, 그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도 아니었는데. 자꾸 시선이 그리로 가 버렸어요. 당신에게로. 
   내 몸에 맞지 않는 감기약을 먹은 것처럼, 비정상적으로 나른하고 몽롱한 상태였어요, 나. 그 날에요. 땅에서 5cm쯤 떨어진 허공에서 허우적허우적 걷고 있는 것 같았어요. 깜짝 놀란 일도 없는데, 계속 얼떨떨했어요. 그런 채로 당신의 기척들을 쫓았습니다. 
   당신이 누구를 배웅해 주러 나가겠다며 두어 사람들과 함께 건물 계단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는, 배웅당하는 사람이 누구인 줄도 모르면서, 나도 계단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습니다. 정작 내 일행은 건물 안에 내버려두고요. 그 일행 중 누구에게도 한 마디 남기지 않고요. 그러다가 당신 뒤를 따라 다시 건물 안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내 일행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자리를 못 잡고 계속 쿨렁거리더군요. 파도처럼 철썩거리는 마음이 당신에게로만 흘러가더군요.  
   이상했어요. 평소 같았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지나치다 싶을 만큼 신중한 나인데. 집에서 낯선 손님을 맞은 유치원생처럼, 방방 들떠 있었어요, 나. 조용하지만 철저하게, 평정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이 사람한테 흔들린다는 말, 자주 쓰이잖아요. 그 날 당신은 나를 아예 거꾸로 뒤집고 마구 흔들어대는 것 같았습니다. 쥐고 있는 것 안에 들어 있는 걸 모조리 털어내려 할 때처럼요. 그렇게 격렬하게 흔들면서 벽에도 막 부딪치게 하는 거 같고. 얼마나 혼미하던지. 그 혼미함 감추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 애씀이 아무 소용없어서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우리가 언제 봤다고? 이상했어요. 누가 이상한 겁니까? 나예요? 당신이에요? 당신한테 이런 느낌 받은 사람이 나 하나뿐인가요? 그럼 난 당신한테 뭐겠습니까? 나한테 당신은 뭐겠습니까?
   그 날 이후로도, 한 번씩, 나는 내 정신을 당신에게 홀랑 팔아먹곤 했습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요. 그런 날에는, 당신을 관찰하는 일 외에 집중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커피 머신 하나를 고장 내 버리기도 했어요. 머신 안에다가 커피 파우더 말고 다른 걸 집어넣는 바람에. 부침개 반죽처럼 허옇고 묽은 물을 컥컥 토해내더니, 머신은 아예 뻗어 버렸습니다.
   가슴이 벌렁벌렁 뛰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막 눈부신 것도 아닌데, 당신한테 모든 주의를 빼앗겨 버린 나는, 왜 그런 희한한 상태에 빠졌던 거겠습니까? 세월이 가다 보면 사랑의 형태가 바뀌는 걸까요? 이런 것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요? 만약 우리가 연인 사이가 되면, 이 증상이 사라질까요? 아니면 더 심각해질까요? 글쎄, 요즘은 당신 마주칠 때, 소화 불량에 걸린 것처럼 가슴속이 울렁울렁 하고, 당신한테서 어떤 화사함 같은 것도 보긴 한데요. 당신한테 내 하루가 확 쏟아져 버리는 빈도도 잦아지거든요.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겠습니까? 그 끝에 당신이 있기나 한가요?




소설집 《너는 어디에 있어?》 : http://www.bookk.co.kr/book/view/2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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