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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n 28. 2017

그만두거나 그만두지 않거나

   나한테는 “이제 그거 안 할 거야.”보다 무섭고 냉철한 말이 있어. 그게 뭔 줄 알아? “내가 여태 그걸 왜 하고 있었지?”야. “이제 그거 안 할 거야.”에는 그 안 한다는 뭔가를 진짜 안 하게 하는 힘이 그렇게 많이 있지 않았는데 “내가 여태 그걸 왜 하고 있었지?”에는 견디기 힘든 허탈감 같은 게 있어서, 그게 그걸 정말 그만두도록 만들더라. “이제 안 할 거야.”라고 말하던 내 마음에는, 그걸 안 하겠다는 마음과 그럼에도 거기에 미련 갖는 마음이 충돌하곤 했는데 “내가 여태 그걸 왜 하고 있었지?”라고 말하던 내 마음에는 공허함과 무의미함뿐이었거든.

   어떤 이유가 갑자기 생겨서 뭔가를 안 하겠다고 하는 것보다, 그걸 해야 할 이유를 더는 찾을 수 없어서 뭔가를 안 하겠다고 하는 게, 어떤 종결을 더 빠르고 확실하게 가져오더라. 그렇기 때문에, 기존 가치보다 유혹적인 새로운 가치가 등장하는 것보다, 기존 가치가 무가치로 돌변되는 순간이 더 무서워. 되돌아올 길, 다시 시작해 볼 길이 없는 거잖아. 그 허무에서 영영 끝인 거잖아.

   그래서야. 누구하고 다툴 때, 차라리 그 사람이 몸서리나도록 미웠으면 싶은 거. 그 사람한테 품고 있던 온갖 정나미가 다 떨어져나가 버리면, 그대로 안녕이니까. 그건 좀 서글프잖아. 그대로 마지막, 이라면. 그래도 좋아하고 아꼈으니 만나서 함께 지낸 사이인데. 그대로 마지막, 이라면. 서로에게 “아니야.”라고 말해 버리게 된다면.    


   너한테는 내가, 어떻게 구제할 방법 없는 바보라는 거 알아. 그래도 난 여전히, 잃는 것보다는 아프거나 힘든 게 나아서 그래. 근데 내가 또 그렇게 매번 멍청하지만은 않거든. 나도 사람이야. 모두를 한결같이 사랑하고, 모두를 잃을까 봐 소스라치지는 않아. 소중한 사람 생각하면서 깜짝깜짝 소스라치다가, 한순간에 확 지쳐 버리기도 하고. 

   한 손바닥으로 박수를 어떻게 치겠니. 혼자 지지고 볶는 거, 나 되게 잘하는데, 나 거기에 엄청 소질 있는데, 그것도 엔간히 하다 보면 끝이 와. 끝내 박수칠 수 없는 한 손바닥은 거둬져. 이쪽으로 내밀어져 있는 다른 손바닥에게 가거나. 

   내 절개에는 유통 기한 같은 게 있나 봐. 그 유통 기한이라는 게, 늘 달라지긴 하지만. 지조 있게 영원히, 누군가를 혼자서 사랑할 수는 없겠어, 난. 품고 살며 어루만질, 쩌릿하게 행복한 기억 같은 게 남아 있다면 모를까. 

   너는 네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내 허무로부터 얼마나 칼 같이 돌아서는지 모르지? 그래 버리는 내가, 난 가끔 질리는데. 너무 매정해서.    


   나를 무자비하게 할퀴고 파헤치고 갈기갈기 흩어 놓는 것 같아도, 내가 어떤 것으로부터 돌아서지 않는 건, 아직 내가 거기에 의미와 이유와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이야. 그것들이 없다면, 나도 거기 계속 머물 이유 없어. 잠시도. 그렇잖아. 

   넌 날 항상 너무 애처럼 생각해. 순진하다고 생각해. 근데 있잖아, 나 그런 최소한의 계산도 안 하고 사는 사람 아니야. 네 생각보다 나, 영악해. 그 정도도 되바라지지 않았다면, 나 지금 아무도 못 만나고 살 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걸. 다들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은, 자기 구실 하며 살아가.




소설집 《너는 어디에 있어?》 : http://www.bookk.co.kr/book/view/2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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