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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l 07. 2017

사랑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자기는 철칙보다 변칙으로 사는 사람이래. 그 사람이 그 말을 딱 하는데, 고개가 그 사람 쪽으로 저절로 돌아가더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내 옆에 두며 살아 볼 수는 없을지 궁금하기도 해서. 

   그런 말을 그렇게 거리낌 없고 자연스러운 말투로 내뱉을 만큼, 유연한 삶을 추구하는 데 대한 확고한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 곁에서 살아 본 적이, 나는 한 번도 없었거든. 오히려 나는 변칙보다 철칙으로 사는 사람들하고만 열심히 얽히고설키면서 살아왔거든. 그렇게 생겨 먹은 게 내 삶이다 보니, 그 사람 목소리 듣자마자, 대책도 없이 마음이 확 터져 오르더라. 그런 사람이랑 한 시절만이라도 부대끼며 살아 보고 싶어서. 꽉 조여 놨던 거 툭툭 풀어놓고, 한번 째지도록 대차게 살아 보고 싶어서.

   아, 근데 거기가 사촌동생 직장이었거든. 내가 알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는 소리지. 이방인의 세계. 사촌동생이 우리 집에 두고 간 옷 돌려주러 갔다가, 그 사람을 만난 거야. 응, 당연히 그 사람 얼굴 봤지. 되게, 뭔가, 똑 부러지게 생겼더라. 이목구비도 이목구비지만, 눈빛에 흐림 같은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어. 글쎄, 내가 그 사람이 한 말을 듣고 그 사람 얼굴을 봐서, 그냥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맘에 쏙 들었어. 그 사람이. 처음 본 사람한테 쓸 만한 표현은 아닌가? 근데 어떡해. 맘에 쏙 든 걸. 

   내가 자기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까, 내 딴에는 다정한 시선이었는데 자기한테는 따가운 시선이었는지, 그 사람이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데. 그러더니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라고. 웬 낯선 사람이 우리 직장에 와서, 나를 이렇게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나, 싶어 하는 표정이더라. 

   그 사람은 내가 무슨 일 때문에 그리로 온 손님인 줄 알았나 봐. 거래처나 계열사에서 나온 사람처럼. 그 사람이 내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사람, 그 회사 신참이더라. 뭐 딱히 중책을 맡은 건 아니지만, 잡다한 치다꺼리는 죄다 도맡아서 해치우고, 또 상사가 안 시킨 일도 눈치껏 해야 하는 게, 신참 역할이잖아. 말이 좋아 신참이지, 동네북이잖아, 그거. 근데 그 사람은 신참답지 않게 빠릿빠릿하데. 자기 책상에서 들고 온 음료수 한 캔 나한테 내밀면서 “어쩐 일로…….” 하고 묻는 거야. “우리 집엔 어쩐 일로…….” 하고 묻는 사람처럼,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없이. 그때 사촌동생이 내 쪽으로 오면서 “언니!” 하고 부른 거지. 다행스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더라. 뭐가 아쉽긴. 그 사람한테 말 한 마디 못 붙여 봤는데, 걔, 누구냐, 사촌동생이 툭 튀어 나왔으니 아쉽지. 요망하게 보이든 말든 “저도 철칙보다는 변칙인데.” 하면서, 말 한 번 걸어 보고 싶었는데. 

   그 사람한테 그 요사스러운 말을 결국 한 게, 그때로부터 3개월쯤 지난 때였나, 그래. 어떻게 하긴.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촌동생한테 있는 아양 없는 아양 다 부려서, 자리 한 번 마련했지. 순 곰인 줄 알았는데, 사촌동생 걔가 눈치가 있는 애더라. 셋이 만나자마자는 술 마시고 싶어 죽겠다고 하면서, 우리를 기어이 술집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엉덩이 붙이자마자 급한 일 생겼다고 내빼데. 나한테 윙크까지 살짝 쏘면서. 손바닥만 한 가방 들고 나가려는 걔 붙들고, 뽀뽀라도 수십 번 퍼부어 줄 뻔했잖아.

   아, 응. 그때까지도 난 그 사람이 좋았어. 그 좋다는 게 그냥, 내 삶에는 전혀 없던 타입의 사람이 나타난 데 대한 경계 반응에 불과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 사람이라는 존재가 나한테 미치는 자극이, 좋았어. 그 사람만 생각하면 몸이고 마음이고 지끈지끈거리는 게, 무슨 병 같기도 했고. 애처럼 ‘음, 이게 사랑인가. 나 사랑에 빠진 건가?’ 싶어 하면서, 허리 비비 꼬고 있는 시간도 좋더라.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 때문에 일상 한쪽이 짜글짜글해지는 게, 얼마 만이었는지. 게다가 그 사람, 내가 쥐뿔도 모르는 사람 아냐. 알면 대체 얼마나 안다고, 그 사람한테 그렇게 절절매는지, 야,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약간도, 아주 약간도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갑자기 딴 사람 된 것처럼 이상해진 내가, 나는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는 거야. ‘이 사람이라면, 나를 완전히 뒤바꿔 놓을지도 모른다.’는, 약간 위험하면서도 유혹적인 예감이 나를 막 콕콕 쑤셔대는 거야. 나 스스로를 바꾸고 싶어 했던 적이 그동안 단 한 번도 없었으면서, 나를 바꾸겠다는 사람한테 손톱이고 이빨이고 다 세웠으면서, 그 사람을 통해 총체적으로 변화될 내 모습은 갑자기 기대되는 거야. 그걸 좀 기다리게도 되는 거야. 아,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 거야, 나한테. 예사 사람이 아닌 거잖아. 안 그래?

   근데 관계라는 건, 박자하고 균형이 맞아야 되는 문제잖아.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다고 해서, 관계가 어떻게 잘 굴러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플레이어 둘이 동시에 덤벼들어야 작동되는 게임인 거잖아. 그래서 난 불안했어. 나만 유난 떨다가, 초파리 목숨처럼 순식간에 끝나 버리는 게, 우리 관계일까 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이제 겨우 요만큼, 요만큼 알아 놓고, 그 사람 없는 날들을 끔찍해 하고 암담해 하는 내가, 참 황당하게 우스우면서도 애잔하더라. 지금도 모르겠어. 어떻게 그런 관계가 가능한 건지. 어떻게 그렇게, 처음부터 저 끝까지 앞서 나갈 수 있는 마음인지. 내 마음에 그런 기능이 언제부터 있었다니? 너한테도, 그 안에 있는 마음에도 그런 기능이 있다니? 

   그 사람 때문에 전전긍긍하면서 보내는 날들은 날벌레처럼 휙휙 스쳐 가는데, 그렇게 빠르게 지나가면서도 그 하루하루가 내 가슴 안에 남기는 자국은 얼마나 깊던지. 아프도록 깊던지. 방법을 하나도 모르면서, 그 사람 붙잡아야 된다고, 나 자신을 얼마나 닦달했던지. 

   난 여전히, 사랑이 뭔 줄 몰라. 그 사람하고 지금 이렇게 한 집에서 같이 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놀고, 웃고, 울고 그러면서도, 이게 사랑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어. 다만, 난 여전히, 그 사람이 귀해. 막 애절하게 귀해. 나한테 이렇게 귀한 사람, 앞으로는 없을 거란 확신이 있어. 어떻게 있겠니. 이런 규모로 내 안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 내 안에 있는 그 사람 존재가 내 존재보다 더 커져서, 그 사람 없으면 나도 없어질 것 같아, 이젠. 바보 같지? 내 선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할 수 없지만, 나중에 사랑의 이름을 하고 오는 감정이 있다 해도, 지금 이 감정만큼 강렬하고 뜨겁진 않을 것 같아. 사랑하고 이 감정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다시 이 감정 갖고 또 한 세월 살아갈래. 그 사람이랑. 

   철칙보다 변칙이라고 하던 그 사람 말 때문에, 내가 그 사람한테 이끌린 건 줄 알았는데, 그 사람 계속 만나고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나는 그 사람 가치관이 좋았던 게 아닌 거야. 나한테는 그 사람이 뭘 하든 그냥 다 예뻐 보이고, 좋아 보이고 그런 거야. 그 사람이 “나는 변칙보다 철칙으로 사는 사람이거든요.” 라고 말했어도, 나, 그 사람한테서 눈 못 떼고 있었을 것 같아. 그 사람 처음 만났던 그 날 말이야. 

   희한하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운명이니, 숙명이니, 그런 소리는 제발 하지 마. 나는 그런 거 안 믿어. 그냥 그 날, 그 순간 내 마음에서 솟구쳤던 그거, 난 그걸 믿어. 운명이나 숙명이 나를 그 사람한테로 떠민 게 아니야. 그냥 내가, 내 느낌으로, 내 발로 그 사람 앞에 간 거야. 나는 그렇게 그 사람 만난 거야. 무엇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장편소설《거울 밖으로》: http://www.bookk.co.kr/book/view/18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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