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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Sep 14. 2017

믿음과 사실을 구분할 수 있는지

송 교수님과 방울꽃





서른이 다 되어 가는 나이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뭇 사람들과 갈등을 겪곤 하는 나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이 어떤 정점에 다다른 무렵이었다. 나는 나와 동갑인 대학 후배 찬연이 조교로 근무하고 있는 대학교로 무작정 찾아가, 찬연이 모시고 있는 송 교수님께 면담을 청했다. 


송 교수님과 찬연의 전공은 철학이었고, 나는 찬연 덕분에 송 교수님과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우리가 만나는 장소는, 대학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재래시장 구석에 위치한 국밥 집이었다. 나는, 찬연과 송 교수님이 미리 도착해 있는 시장 골목으로 접어드는 모퉁이에서 ‘철학이랑 국밥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나. 다들 국밥 되게 좋아하네.’ 하는 엉뚱한 생각을 갖곤 했었다.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을 물끄러미 둘러보는 습관을 가진 송 교수님은, 내게 한 번씩 “당신 나한테 못다 한 말이라도 있어?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해.”라고 조용히 말씀하셨고, 그럴 때면 으레 “여럿이 있는 데서 못할 말이면, 혼자라도 와서 뭐든 얘기하라고. 나 시간 많으니까.” 하는 말을 덧붙여 주셨다. 제자도 아닌 나에게. 


처음에 송 교수님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두 손을 펄럭펄럭 저으며 “아니요, 못다 한 말이라니요.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라고 했었는데. 혼자 송 교수님을 뵈러 가는 차 안에서 깨달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던 조급증과 초조함과 불안과 불만이 송 교수님께는 고스란히 읽혀 왔음을. 송 교수님이 그동안 말씀하신 ‘못다 한 말’이라는 것은 내 머리가 못다 한 말이 아니라, 내 마음이 못다 한 말이었던 모양이다.






송 교수님은, 그동안 내가 만난 다양한 학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분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송 교수님은 학자에 속하기보다 도인道人에 속하는 것 같았다. 내면에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몸소 체험한 경험으로부터 짜낸 실용적인 교훈을 차곡차곡 쌓아 가는 사람 같았다. 책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침반 위에 서 있는 사람 같았다. 송 교수님은 자기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궁구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송 교수님의 그 투철함에 매료되었다. 모쪼록 자기 삶을 잘 일궈 나가고자 하는 데 대한 투철함에. 한 인간을 향한 존경과 호감이 한꺼번에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송 교수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왜 이제 왔어?”


송 교수님 연구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송 교수님이 나를 돌아보며 퉁명스럽게 말씀하셨다. 송 교수님은 작은 세면대 앞에서 허리를 구부린 채로 양치를 하고 계셨다. 나는 송 교수님이 내게 던진 말의 정확한 뜻을 헤아릴 수 없어, 얼마간 허둥지둥했다. 


“나 어려워하는 사람 별로 없는데. 당신은 내가 어렵나?”


눈짓으로 자리를 권해 주시며, 송 교수님이 내게 물었다. 자기보다 스무 살, 서른 살 어린 사람도 절대 ‘너’라고 부르지 않는 송 교수님의 화법이 문득 새삼스러웠다.


“교수님이 어렵다기보다, 저한테는 윗사람하고 단둘이서 만나는 자리 자체가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가뜩이나 저는 교수님 제자도 아니라서, 연구실로 직접 찾아오기에는…….”

“국밥 집에는 잘만 오더니. 왜, 지금이라도 자리 옮길까? 여기보다는 거기가 편하겠어? 난 어디서 얘기하든 상관없는데. 당신 편한 대로 하자고.”

“아닙니다. 이왕 오고 나니까, 이제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당신, 이제는 당신한테 뭐가 제일 불편한지 말로 표현해 낼 수 있겠나? 그래서 오늘 여기까지 찾아온 거 아니야?”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그 어느 정도가 어떤 어느 정도인지 말해 보라고. 천천히, 내키는 데까지.”






“교수님, 제가요. 자꾸 다투게 돼요.”

“누구하고?”

“누구하고든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노련해지는 것들이 생기긴 하거든요. 근데 사람들하고 다투는 문제는 좀처럼 해결되지가 않아요. 나아지는 기미도 안 보이고. ‘그러지 말자. 제발 좀 그러지 말자.’ 하면서도,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면요. 누구하고 싸우고 있어요, 제가.”

“어떤 거 때문에 싸우는데?”

“그냥 진짜 별거 아닌 걸로도 싸우고, 아니, 대부분 그래요. 나중에 돌아보면 ‘이게 진짜 이렇게까지 열 올릴 문제였나.’ 싶은, 그런 걸로 옥신각신해요.”

“음……. 당신, 믿음과 사실을 변별해 낼 수 있겠나?”

“네?”

“당신이 누구한테 내세우는 게 당신 믿음인지, 사실인지, 구분할 수 있겠느냐고.”

“그게 무슨 말씀인지 잘…….”

“내 믿음을 사실이라고 착각하면, 내 믿음과는 다른 타인의 믿음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져. 사실이 아닌 거라면 뭐겠어? 틀린 거지. 내 경우에는 그 멍청한 착각에서부터 갈등이 시작됐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말이야. 내가 뭔가를 보고 나면, 내가 그것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는 거라고 착각했어. 아주 극성스럽게 착각했어.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 의견을 수시로 짓뭉갰네. 아니라고, 그건 옳지 못한 거라고 몰아세우면서.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는 나랑 함께 지내려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더군. 내 옆에 있어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잖은가. 매양 틀렸다는 소리만 들을 텐데……. 고약한 외톨이 신세가 되고 나서, 우연히 카메라를 하나 사게 됐어. 왜, 산이나 들에서 이런저런 장비 잘 갖춘 아저씨들이 들고 다니는 시커멓고 큼직한 카메라 있잖아, 그거. 그 후로는 나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는 낙으로 지냈어. 어느 여름에는 제법 큰 섬으로 들어갔네. 거기서 두어 계절을 났거든. 그 섬에는 운치 좋은 숲이 있었는데, 9월쯤 되니까, 그 숲에 방울꽃이 만발하더군. 새벽마다 보랏빛 물 곱게 들어 있는 방울꽃을 찍으러 다녔어. 하루는 카메라 메고 숲에서 걸어 내려오는데 말이야. 그런 생각이 번뜩 들더라고. ‘아까 내가 내 카메라로 방울꽃을 스무 송이 정도 찍었는데, 그게 진짜 그 방울꽃들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나는 카메라로 방울꽃의 한 면만 찍어 왔잖아. 카메라에는 방울꽃의 뒷면도 담겨 있지 않고, 향기도 담겨 있지 않고, 땅 밑에 있는 방울꽃의 뿌리도 담겨 있지 않고, 방울꽃의 옛날 모습이나 나중 모습도 담겨 있지 않잖아. 내가 그 날 카메라로 찍은 건 방울꽃의 일부분이었던 거야. 방울꽃이라는 한 사실의 일부분. 극히 일부분. 머리가 띵하더군. 그제야 내 외톨이 역사가 고스란히 이해되기 시작했어.”

“아…….”

“여기까지 알아듣겠나? 내가 뭔가를 봤다고 하는 건, 그 뭔가의 전체 사실을 두루두루 본 게 아니라, 부분적인 사실을 본 것일 뿐이더라고. 내가 서 있는 각도에서 말이야. 그 일부분만 보고는 그것의 전체가 어떨 거라고 추측하고, 그 추측을 믿는 거지. 내가 그동안 사실이라고 내세운 것들은 전부 내 믿음에 불과한 거였는데. 그걸 몰라서 애꿎은 사람들을 많이도 후려갈겼어. 그 죄를 다 어떡할 거야…….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혹시 당신도 그런가 싶어서. 그래서 한번 물어 봤네. 사실에는 옳고 그름이 없더라고. 사실은 사실일 뿐이라서. 내 마음에 옳고 그름을 나누는 기준이 생긴 건, 내가 사실 위로 내 믿음을 덮어 놓았기 때문이었네. 그 맹목이 때로는 모든 걸 부숴 버렸어.”


말을 마친 송 교수님이 헐렁하게 쥔 주먹으로 자신의 뺨을 쓸어내렸다. 내 목 바로 아래까지 차올라 부글부글 들끓던 고백들과 물음들은 어딘가로 모조리 사라져 버린 듯했다. 할 말이 변변찮았다. 나는 말간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무릎 끝에 닿은 유리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어딘가에서, 생김새도 모르는 방울꽃 향기가 맡아지는 듯도 했다. 연구실 세면대에서 흘러나온 치약 냄새인지도 몰랐다. 






ㅡ 산문집 『가치에 대한 이야기』:

http://www.bookk.co.kr/book/view/2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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