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 엘레베이터와 계단 사이

<무제의 나날들> 2025년 8월 5일 화요일

by 무도인 박대리

이제 무릎을 다친 지 딱 한 달을 꽉 채웠다. 무릎에 큰 차도는 없다. 지난주부터 다시 정상 출근을 시작했는데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힘겹다. 도중에 갈아타는 바 없이 6호선으로만 출근하기에 수월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6호선은 생각보다 깊은 지하를 달리고 있었다. 계단을 타고 한 발짝씩 내려가는 건 더없이 길고 괴로운 일이었고, 그나마 노약자 엘레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레베이터라는 존재가 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엘레베이터가 없었다면 애초에 출퇴근 자체를 포기했을 터다.


다만 엘레베이터를 타는 것에는 오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했다. 승강장에서 지상으로 바로 연결되는 엘레베이터가 있는 곳도 있지만 가끔 중간 층에서 내려서 걸어서 다른 엘레베이터로 이동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움직임이 불편한 노약자를 위한 시설이므로 문이 닫히는 데에도 긴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급한 마음으로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는지 알 것 같았다. 종종 스마트폰을 보며 느릿느릿 걸어가는 앞사람에게 화가 치솟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요즘은 몸이 느려진 만큼 마음이 느려지고 있다.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신호가 바뀐 횡단보도를 보고 허둥거리며 달려갔을텐데, 이제는 횡단보도 출발선까지 5m를 남겨둔 상황에서 보행신호에 녹색불이 들어오면 애초부터 건너기를 포기해버린다. 녹색불이 켜지고 '준비, 시작!' 하고 횡단보도 시작점에서 열심히 목발을 짚고 출발해야 아슬아슬하게 건너편 인도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시간 안에 건너지 못하면 차마 고개를 못 든다. 횡단보도의 말미에서 차량 운전자들에게 꾸벅거리며 '미안합니다'를 연발한다.


또 다른 변화는 어르신들과 말을 섞게 되는 순간들이 많아졌다는 거다. 아무래도 목발을 짚고 있으면 노약자분들과 함께 이동하게 되는 순간들이 많다. 엘레베이터라던가, 노약자석이라던가, 느릿느릿 어르신과 횡단보도를 함께 건넌다던가. 어르신들은 혼잣말이 많다. 엘레베이터 층을 잘못 누르시기라도 하면 '아이고, 여긴가? 아닌가보네.' 누구도 답하지 않을 말을, 머쓱함 없이 종알종알 길게 내뱉고 멀뚱히 서계신다. 아마 자신의 실수로 인해 엘레베이터가 지체되는 것에 대해 해명하시는 것 같아서, 그 혼잣말이 간질간질 귀엽게 다가올 때도 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과 뒤섞여 있을 때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다정한 오지랖이 많은 편이다.


- 이 더운 여름에 어쩌다가 다쳤어?(이 얘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 이쪽으로 들어와. (엘레베이터) 만원 불 들어와도 올라가니까 그냥 들어와.(사고 나는 거 아닌가.)

- 여기 앉어.

- 뭐하다가 다친 거야? 유도하다가? 아하! 다 낫고 다시 도전하는 거야. 올림픽으로!(길게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네! 열심히 다시 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해드렸다.)


비단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 보는 서로를 향해 마치 같은 반 친구에게 말걸듯이 슴슴한 말을 나눈다. 날씨에 대한 얘기, 또는 누군가 엘레베이터에 귀여운 강아지를 안고 타면 서로서로 '얌전하다', '귀엽다', '아기 같다'며 한 마디씩 얹는다. 그리고 강아지는 입도 뻥긋 안하지만 안고 있는 어르신이 복화술로 화답해준다. '감사합니다! 멍멍!'

나는 엘레베이터에 무제를 짚고 서서, 어린 시절 나를 길러주시던 할머니 생각을 하며 선선히 같이 말을 맞추고 발을 맞춘다. 어르신들은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던 것도 잠시일 뿐,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면 쌩, 하고 각자의 방향으로 쿨하게 사라지신다. 뜨거운 여름의 햇살 속으로-


엘레베이터의 배신

그런데 또 하필 최근에 한동안 집 앞 지하철의 승강장 에스컬레이터가 고장났다. 높이가 상당한 에스컬레이터인데 하필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고장나는 바람에 퇴근길의 지친 인파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높은 계단을 걸어올라가야만 했던 것이다. 승강장에는 엘레베이터를 중심으로 좌우로 내려가고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이 데칼코마니처럼 배치되어 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계단과 엘레베이터 앞에 고민하곤 하는데 결국 엘레베이터 앞에 평소보다 더 긴 줄이 늘어서게 된다.

참, 사람의 심보라는 게 신기하다. 평소에는 엘레베이터에 어떤 사람이 타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간혹 젊은 사람이 타다가 어르신들에게 꾸중을 듣는 경우를 보기도 했는데 그것에 대해 '모두가 이용하는 공공시설인데 젊은 사람도 간혹 가다가 탈 수 있는 거 아닌가?'라고 그냥 가볍게 생각하고 지나쳐왔었다. 그래서 아마 내가 다리를 다치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이와 같이 에스컬레이터가 고장난 상황에서도 '이참에 운동 한 번 더 하지, 뭐!' 하고 계단으로 올라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내가 노약자의 상황에 놓이고, 엘레베이터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장사진을 이룬 엘레베이터 줄을 보며 나도 모르게 화가 나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느린 엘레베이터인데 두어 차례를 만원으로 실은 인파를 올려보낸 뒤에야 탈 수 있었다. 목발을 짚고 서서, 마치 그것이 응당 엘레베이터를 탈 수 있는 놀이기구 탑승 티켓이라도 되듯이 나는 자꾸만 사람들을 검열하고 있었다.(?)

저 사람, 젊고 건강해보이는데 왜 타지? 나는 내가 타지 못하고 바로 앞에서 닫히는 엘레베이터 문 사이로, 스마트폰에 눈을 콕 박고 있는 저 사람에게 미움을 느끼고 있었다.


엘레베이터 안쪽 구석에 기대서서, 사람들의 땀냄새에 파묻혀 나는 내 옹졸한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서러움이 뭉클, 뜨겁게 차올랐다. 그들이 노약자에게 엘레베이터를 양보하고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선택적 배려일 터다. 그들도 힘든 하루를 보냈다. 어쩌면 어딘가 신체적으로든 마음이든 아프고 불편할 수도 있는 것이고. 나는 단지 조금의 기다림도 못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하루 아침에 갑자기 제대로 걷지 못하고 원활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스스로를, 몸이 불편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지금의 이 신체적 불편은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자연스레 찾아올 노화와 닮아 있다. 언젠가는 누구든 겪을 수밖에 없게 될 감각이다. 그때 느낄 무력감과 박탈감을 미리 경험해보고 있는 것이다. 매사에 친절하자고 다짐한다. 언젠가 되돌려받지 못할 친절과 배려일지라도 지금의 이 일시적인 몸의 불편을 기억하고 어르신들에게 따뜻하게 대하자. 어리고 약한 존재들에게도, 느린 존재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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