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의 나날들> 2025년 7월 28일 월요일
오늘부터 다시 사무실로 출근했다. 2주 동안의 재택근무를 마치고 지하철을 타려하니 월 정기권인 기후동행카드가 만료돼있었다. 재택근무랍시고 히키코모리처럼 집에서만 제법 오랜 시간을 보냈구나, 실감했다. 여전히 목발 없이는 걷기에 불안정하다. 통증도 수반되고. 목발 '무제'를 오른쪽 겨드랑이에 끼고 왼쪽 어깨에 회사 가방을 걸치고 왼손으로 양산을 받쳐들었다. 뙤약볕을 목발로 걷고 있으면 걷는 속도가 느려서 온몸이 땀으로 젖으면서 동시에 불타는 기분이다. 번거롭고 꼴이 우스워보이지만 양산이 없으면 아마 얼굴에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날이 더워진 것도 장마 전선만큼이나 곤욕스럽지만, 회사에 더이상의 재택근무는 면목이 없어서 부탁드릴 수 없었다. 부탁을 드린다면 어찌저찌 또 편의를 봐주시겠지만, 함께 책을 만드는 이들은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회사 복합기에서 표지 시안들을 실물 크기로 출력해서 확인해보고 싶기도 했고. (여전히 감이 부족해서 모니터만으로는 글자의 적당한 크기감을 잡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사무실의 사람들이 많이 그리웠다. 십여 명의 인원이 모여 앉아 만들어내는 고요함과 집중력. 사무실 4층의 공기는 일반적인 H2O와는 다른 성분으로 이뤄진 것만 같다.(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의 LCL용액 같은 걸까. 숨은 쉬어지지만 산소와는 다른 형태의 무언가.) 아무튼, 비가 줄기차게 내렸던 7월 중순을 집에서 보낼 수 있었으니 그걸로 된 거다. 출퇴근길은 고생스럽지만 그래도 사무실 자리만큼 쾌적하고 편안하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병원을 옮길까 고민했었다. 몇 개월 전 팔꿈치 인대가 찢어졌을 때 방문했다가 정성껏 진료를 봐주던 홍대입구역 인근의 정형외과가 떠올랐기도 했고, 재택 근무도 끝났겠다 병원을 사무실 인근으로 옮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다니고 있는 집 인근의 병원에 크게 신뢰가 가지 않기도 했고. 뜻모를 통증이 밀려올 때마다 막연히 '다른 의사에게도 한번 진료받아보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자꾸만 밀려왔다.
그러나 사실 통증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일 터다. 이제 다친 지 고작 3주가 됐다. '신뢰가 가지 않는다'라는 건 그저 그만큼 내 마음이 조급하다는 거겠지. 무력감과 답답함이 짠 파도처럼 밀려올 때가 있다. 목발을 짚고 걷는데 길가에 세워진 따릉이들을 볼 때, 곁으로 누군가 운동복을 입고 달려갈 때, 숏폼에서 무심코 유도나 복싱 콘텐츠를 볼 때, 횡단보도에서 이제 절반 정도 건넜는데 보행 신호가 빨간불로 넘어갈 때, 몸이 망가져가는 걸 거울로 확인할 때, 아침에 일어나 아픈 무릎으로 몸을 지탱해보다가 통증을 느낄 때, 문틀 철봉에 가만히 매달려 있는 저녁, 헐크 호건의 죽음, 그냥 그런 순간들. 나아가 지금 만약 길을 걷다가 신림역 칼부림 사건 때처럼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고 나를 해치려 다가오면 나는 꼼짝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다. 잘 도망치기 위해 운동해왔는데 정작 운동을 하다가 크게 다쳐서 도망을 치지 못하게 됐다. 자승자박이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밀려올 때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병원을 옮기겠다는 생각을 접고 원래 다니던 병원에 들러 체외충격파치료를 진하게(?) 받았다.(정말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으면서 고통스러운 치료다.) 너덜거리는 무릎으로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간 벼려왔던 제육볶음을 만들기로 했다. 지난 주말에 양배추를 쪄놔서 샐러드처럼 먹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계속 제육볶음을 같이 곁들여 먹고 싶었다. 장보기 어플로 돼지고기 앞다리살 500g을 주문해놓고 아침에 어질러놓고 갔던 설거지를 했다. 고무장갑을 벗으니 현관 앞에 바로 돼지고기가 놓여 있었다.(매번 1시간도 안되어 이렇게 도착하는 물건들을 볼 때마다 마법 같다고 느낀다. 정말, 기묘한 세상이다.)
제육볶음은 처음 만들어보는 거라 인터넷의 '만개의 레시피'에 나와있는 그대로 따라했다. 양념에 버무린 돼지고기를 30분간 냉장고에 재워두고 한시름 쉬는데 마침 유도관의 류준열씨(연예인 류준열과 묘하게 닮았다.)로부터 안부 연락이 왔다. 목발은 짚고 있으나 잘 지내고 있다고, 정말로, 진심으로 대답했다.
저는 즐거이 푹 쉬며 회복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인대가 파열된 날, 마지막 대련을 류준열씨와 했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그의 마음이 불편하기라도 한 건 아닌지, 내내 미안하고 미안했다. 류준열씨는 깔끔하고 안전하게 대련을 받아줬다. 그저 내 몸이 낡고 제 주제를 몰랐을 뿐인데... 언제 다쳐도 이상하지 않을 시한폭탄, 넝마 같은 몸 상태로 대련을 계속하겠다고 도복을 입었던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마음에 불필요한 부채의식을 주고 마는 것이다. 그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타인을 다치게 한 사람처럼 되어버리잖아.
대파 기름을 낸 뒤, 붉게 재워둔 돼지고기를 볶았다. L이 대파 기름을 솜씨좋게 내던 걸 회상하며 흉내내본다. 양념이 타지 않게 불조절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며칠 전부터 꿈꿔온 대로 찐 양배추를 냉장고에서 꺼내 뜨거운 제육볶음을 한점 얹었다.
정말 이렇게 쌈싸서 먹고 싶었는데, 아, 진짜 맛있다.
그렇게 행복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