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틀 철봉에 매달려 보내는 광복절

<무제의 나날들> 2025년 8월 15일 금요일

by 무도인 박대리

말복과 입추가 지났는데도 이번주에도 비가 많이 왔다. 대표님께서 주 2회 재택을 허락해주신 덕분에 목발을 짚고 비를 뚫고 걷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이번주는 금요일이 광복절 연휴라서 되도록 재택은 하루만 쓰려고 했는데 목요일 아침에 눈을 떠보니 빗줄기가 세차게 때려붓고 있었다. 도저히 목발을 짚고 나아갈 엄두가 안 나서 멀쩡한 한 쪽 무릎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려니, 과장님께서 먼저 메시지를 주셨다.

'대리님, 혹시 모르니... 비 너무 많이 오니까 오늘도 조심히 재택해요~'

과장님께서 메시지를 보내주신 시각이 8시도 되기 전이었는데 아마 내가 목발을 짚고 출근하기 전에 미리 말씀을 주시려고 서둘러 메시지를 보내주신 듯했다. 정말 세심하시고 다정하시다. 업무를 하다가 다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배려해주시고... 덕분에 여름 끝자락의 물폭탄을 무제와 함께 피할 수 있었다. 아마 한손으로 우산을 들고 나머지 손으로 목발을 짚고 가방을 짊어지고 이 세찬 빗줄기 안으로 들어갔다면 미끄러져 넘어지던 흠뻑 젖던 난리를 겪었을 것이다. 한창 일을 하고 있으려니 오전 중에 집 인근의 역 하나가 물에 잠겼다는 뉴스를 접했다. 하마터면 성치 않은 다리로 거센 물살을 헤치고 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재택 근무를 하면서 졸릴 때마다 침실 문틀에 매달아 놓은 철봉에 매달리곤 한다. 대롱대롱 몸을 늘어뜨리고 매달려 있기도 하고 턱걸이를 연습하기도 한다. 작년 12월 말에 '2025 한해살이 빙고판'에 '턱걸이 10개 한번에 하기'를 적었었다. 웃기게도 1행 1열 칸에는 '허벅다리 걸기로 상대방 넘겨보기'가 적혀 있는데 이 다리로는 절대 올해 안에 허벅다리를 차보지 못할 터였다. 무릎이 성치 않으니 상체 운동이라도 열심히 하자는 마음, 그리고 한해살이 빙고판에서 턱걸이 칸이라도 완수해보자는 마음으로 일없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매달려 있노라면 초등학교 시절의 방과후 운동장이 떠오른다. 당시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친구도 없으면서 학교가 파하면 운동장 놀이터에 혼자 가서 가방을 던져두고 뛰어 놀았다. 그리 친하지 않은, 낯선 아이들과. 아마 나와 같이 학원을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었던 것 같다. 늘 비슷한 얼굴들이었는데 그 삼삼한 멤버들만큼이나 운동장의 놀이기구 구성도 보잘 것 없었다. 높이가 다른 철봉 3개와 사다리봉 놀이기구가 전부였다. 몇 년 뒤에는 구름다리도 생기고 정글짐도 생겼던 것 같은데 내가 한창 방과후를 그렇게 야인처럼 보내던 시절에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막대기 놀이기구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방과후에 별 일정이 없었던 우리들은 그 놀이기구를 타고 재미나게 놀았다. 특히 일없이 철봉에 매달려 있었다. 제일 좋아하는 건 철봉에 올라가 앉아있는 거였다. 철봉을 바라보고 원숭이처럼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왼발은 가로 봉에 무릎까지 걸어두고 오른발 발등을 풀어 내린 뒤, 철봉의 기둥 뒤편에 걸고 밀어준다. 그리고 팔로 몸을 당겨 가로봉에 상체를 밀착시키면서 부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새 철봉 위에 올라가 있다. 나는 그 팔과 다리의 협응을 통한 기계적인 움직임이 재미있어서 오르내리는 동작을 늘 반복하며 놀았다.

때때로 다른 아이들과 철봉에 매달려 다리로 씨름을 하기도 하고, 모래를 뭉쳐 눈싸움 하듯 상대팀에게 던지며 놀았다.

'모래 안에 돌을 넣자!'라는 기발한 아이디어에 모두 신이 나서 삼각김밥 안에 참치 앙꼬를 넣듯이 자갈을 집어넣고 던졌다. 다친 아이는 없었던 걸로 보아 아마 모래가 날아가며 힘없이 풀어져 그저 땅에 나뒹굴었을 뿐이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철봉에 매달려서 보냈던 시간들이 상체 근육이 발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유도를 시작하던 초기에 제법 여자 치고는 힘이 좋다고, 그리고 아귀힘이 괜찮다고 칭찬을 들었더랬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의 학창시절에는 운동이라고는 체육시간 외에는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니까. 그런 거라면 그때 철봉에서 할 일 없이 나와 뛰어놀던 아이들은 지금 또 얼마나 강한 모습으로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들. 자신들의 힘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의아해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릎을 다치고 거의 힘을 주지 않고 5주 정도를 보냈더니 이제 근육이 많이 빠져서 하체에 근육이 다 녹아내린 기분이다. 상체마저 근육이 녹아버릴까봐 매일매일 철봉에 매달린다. 지난주에는 턱걸이를 고작해야 3-4개밖에 못했는데 이제는 6개까지 한다. 양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제법 억세게 박혔다. 무력감으로만 점철된 일상에서, 아주 오랜만에 육체에서 비롯되는 성취감을 느꼈다.

의사 선생님은 차차 조금씩 다친 무릎을 굽히는 연습을 해보라고 하셨다. 목발은 여전히 3-4주는 더 해야 하지만 그래도 장족의 발전이다. 의사 선생님께 그 말을 듣고 귀가하는 내내 집에 가서 무릎을 접어볼 생각에 설레서 목발을 짚은 손과 발걸음이 빨라졌다. 잠들기 전에 살살 무릎에 힘을 빼고 팔의 힘으로 인형의 사지를 접듯이 움직여 본다. 뻐근하고 기이한 기분이지만 통증은 생각보다 심하지 않다.

울고 싶고 절망하고 싶은 순간이 자꾸만 찾아온다. 그렇다고 뭐 어쩌겠어. 이미 이렇게 망가져버린 걸. 포기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자고, 다짐한다. 철봉을 붙잡고 또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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