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선물, 각인

<무제의 나날들> 2025년 8월 22일 금요일

by 무도인 박대리

무릎을 다치면서 운동도 못하고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된 지 2개월이 다 되어간다. 10년 전에 똑같은 부위를 다쳤을 때도 이렇게 목발을 오래 짚었던가? 이렇게 차도가 없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된 비교군을 두고 있으니 마음이 곧잘 불안해지곤 한다. 부상으로 운동을 못하게 되는 일상을 상상하곤 했는데, 우려했던 것보다는 평안하게 잘 회복하며 지내고 있다. 그간 멀쩡한 사지로 삼켜온 무력감들이, 지금의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무력감을 상쇄한다. 나날이 무력감에 무뎌진다.


어제(2025년 8월 21일 목요일)는 재택 근무여서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커피를 내리며 근무를 준비하던 아침, 주문한 적 없는 택배가 오후 늦게 도착할 거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주)야와라에서 발송했다는 멀티백과 미니도복 2개. (야와라는 도복 브랜드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구매한,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브랜드 도복. 하지만 내 회원 정보가 야와라에 있을 리도 만무할 뿐더러 굳이 내게 가방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요즘 택배를 이용한 피싱 사기가 횡행한다는데 설마 그것일까?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하루를 보냈다.


오후 늦게 정말 택배가 도착했다. 송장에는 내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누군가 착각하여 잘못 발송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반품을 염두에 두고, 택배 상자를 살짝만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도복을 담는 검은 가방과 미니도복이 들어 있었다.

(택배 피싱의 수법은 이런 주문한 적 없는 택배가 왔을 때, 피해자가 송장에 적힌 발송인 번호로 연락을 하면서 시작된다. 그렇기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미끼를 물어보기로 했다.)

야와라에 전화해 물어보니 유도관 관장님이 주문하셨다고, 관장님께 여쭤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홍제리얼유도 관장님께서? 다친 이후로 도장에 못 간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갑자기 이걸 왜 보내셨을까. 잘못 보내신 것 같아서 포장을 그대로 둔 채 일단 관장님께 가방을 받았다고 메시지를 드렸다.

메시지를 보내놓고 망연히 도복 가방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켠이 누군가 움켜쥐듯 아팠다. 다시 도복을 입을 수 있을까? 입는다고 해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때쯤이면 나는 삼십대 중반을 넘어 유리 같은 몸에 한 걸음 더 가까워져 있을 것이다. 애초에 내게 어울리지 않는 운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꾸 다치는 거라고-

가족들은 계속 내게 유도를 그만하라고 한다. 이제는 좀 안전한 운동을 해야 하지 않겠니? 나는 슬픈 마음에 침대에 누워 눈을 붙였다. 예전 같았으면 운동을 하러 도장에 가있을 시간인데...


짧은 저녁잠을 자다가 깨보니 관장님으로부터 답이 와 있었다. 빨리 회복하시라는 의미에서 보내주셨다고. 응원의 메시지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감사하다고 주억거리고 그제야 가방의 포장지를 벗겼다. 복주머니처럼 가방을 줄로 당겨 여미는 스타일의 클래식한 스타일의 백팩이었다. 예전에 이런 가방을 가지고 싶었는데 여력이 되지 않아 마련하지 못했었다.

반가움에 가방을 펼쳐보는데 어깨끈에 '무도인 박대리'라고 고딕체로 적혀 있었다. 검은 가방에 하얗게 선명히 쓰인 글자를 보고 혼자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하고. 미니도복도 살펴보니 무도인 박대리라고 적어 주셨다. 가방을 매고 거울 앞에 서봤다. 왼쪽 어깨끈에 세로로 무도인 박대리, 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관장님, 이거 너무 웃겨서 어떻게 매고 다니죠.

'무도인 박대리'는 운동 계정과 인스타툰 작업을 위해 나 스스로에게 지어 붙인 이름이다. 나에게는 말도 안되는 과분한 닉네임이라는 걸 알고 있다. 못생기게 분장한 개그맨이 무대 위에 '장동건'이나 '차은우'라는 이름표를 달고 올라와서 웃음을 구걸하는 것처럼. 심지어 지금은 다리도 망가져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와중이니 무도인 박대리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도 혼란스럽고 절망적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호명해주셔서 감사했다. 좀더 싸워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어서 낫고 싶다-. 포기하고 싶었던 마음이 물러난다. 어느날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싫고 무섭다가도, 또 이렇게 어느날은 사람으로 괜찮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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