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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산박 Jul 11. 2022

세상에, 너마저 나무를 한다니...

김홍수! 친구야, 네가 보고 싶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 옛 친구들이 많이 생각난다고 하는데, 한때 텔레비전에서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이 인기였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 이야기 속으로 쏙 빠져들었던 추억이 생생하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보고 싶은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친구나 선생님의 모습이 아련하게 지나갔고, 그때 그 시절이 정말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중학교 때 짝꿍 친구, 난 그 친구가 그렇게 보고 싶었다. 지금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 친구는 비록 집안은 가난했지만, 공부도 잘했고 그림도 잘 그리고, 무엇보다도 착하고 성실한 친구였다. 세월이 흘러 오십 초반에 다른 친구에게 그 친구 근황을 들어보려고 물었더니, 이미 그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식사를 하다가 한참 동안 말문이 막혔다.     


“아니, 도대체! 서른에 왜 죽어?”     


젊은 시절, 그 친구는 집안이 가난해서 고등학교에 못 갔고, 다행히 울산 H중공업에 취직해서 거기에서 고등학교와 야간 대학교까지 나왔다고 한다. 가난하게 살아 고등학교 진학도 못 했으니 얼마나 공부가 하고 싶었을까. 그런데 어느 해 여름, 결혼할 여자 친구와 지리산에 갔다가, 발을 헛디뎌 당시 폭우로 불어난 계곡물에 빠져버렸다고 했다. 그 상황을 상상해 보니 정말 기가 막혔다. 그 현장을 직접 본 여자 친구는 어땠을까, 그 큰 트라우마를 어떻게 잘 견뎌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렇게 내 마음속에 살아 있었던 그 친구는 친구에게 그 소식을 듣기 이십 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친구였다. 너무나 안타깝고 안됐고 아쉬웠다. 왜, 또 운명은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살았던 사람들만 거두어가는지 참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일기를 읽다 보니 나도 그렇게 허망하게 가버린 그 친구가 그렇게 생각이 났다. 아버지께서도 가난하고 못 먹었던 그때 그 시절의 초등학교 친구가 그렇게 그리우셨던 것 같다.         


  

요즈음 웬일인지 그 친구가 보고 싶다. 해가 더할수록 보고 싶다. 어릴 때, ㅇㅇ국민학교에서 같은 반으로 자웅을 다투면서 살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어려운 시절 먹을 것 없이 굶주리면서 살았기 때문인가, 나는 요즈음 그가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

내 나이 83세. 옛날 같으면 최고령이다. 그때 말로 여든에 죽어도 한이 없다고 했었다. 여든까지 사는 사람을 최고령으로 아주 오래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으로 여든이면 여생이 임박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랬을 것이다. 친구는 그 굶주린 세상에 못 먹어 연약 가정에 호열자가 들어와 부모님을 잃었다. 못 먹고 못 살 때 생명선이신 부모님을 잃었으니 그 슬픔이 얼마나 컸을지, 문병, 묘상도 할 겨를도 없이 흘러버린 세월. 그 친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든 것이 궁금하고, 서로 뭐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만나서 손도 잡아 보고, 얼굴도 보고, 말도 좀 해 보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싶다.      

나는 국민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도 못 하고, 지게 짊어지고 등신령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 그래 너도 알지. 내가 나무하러 다니면서 네 생각이 나서 홍수는 뭘 하냐고 누군가에게 물었더니 너도 나무를 하러 다닌다고 하더라. 나는 가슴이 아팠다. 나는 어쩔 수 없지만, 나 졸업하던 해 우리 아버님은 밤잠에 뇌출혈이 발생해 사경을 헤매셨다. 가까스로 회복이 되었지만, 거의 반신불수가 되시어 농사일이 나에게 안겨져서 고삐 단단히 매인 소처럼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홍수 너마저 나무를 한다니 가슴이 아팠다. 네가 서울로 올라간 후, 한 번인가 보고 지금까지 못 봤는데 요즈음 정말로 네가 그렇게 보고 싶구나.

- 그 친구가 보고 싶다 2017년, 일자 미상

*호열자 : 콜레라          



아버지의 친구 홍수라는 분. 그 친구분도 참 어렵게 사셨는가 보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집안에 콜레라까지 들어와 그로 말미암아 부모를 잃었던 친구. 아버지는 가난한 시골에서 중학교 진학도 하지 못하고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서 고삐 매인 소처럼 일을 해야 하는 당신의 처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어려웠던 친구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모습이 일기에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너마저 나무를 한다니...’ 아버지는 그때 그 시절을 힘들게 살아온 친구에 대해 동병상련을 느끼셨던 것 같고, 세월이 한참 지난 후 그 친구가 어떻게 변했을까 무척이나 궁금하셨던 것 같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옛사람들이 그립고 자꾸만 그 시절로 생각이 돌아간다는데, 이런 글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 해 전에 많았던 것으로 봐서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곤 했다.       


아버지의 연세 83세. 많다면 많고 또 건강하면 더 오래 살 수도 있는 나이. 아버지는 겉모습은 노쇠하고 농촌 일에 힘겨워하셨지만, 그래도 속은 건강한 편이셨다. 66세 때 위암 판정을 받았지만, 다행히 발견 시점이 초기라서 수술로 완치가 되었고, 이후 위가 작아져서 식사를 여러 번 하는 번거로움은 있었지만, 늘 식사도 잘하시고 속이 편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평소에 몇몇 인근 마을의 식사 친구와 자주 외식을 하고 다니셨다. 주로 그 친구들 중에서 그런대로 잘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주로 그분이 식대를 낸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연세에 좋은 승용차를 갖고 다니는 바로 그 친구 덕으로 몇몇 친구들과 함께 멀리 맛집을 다니면서 식사를 하곤 하셨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과거 배고팠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시면서, 아마도 지금 우리 서민이 먹는 식사가 절대로 조선 시대 임금 수라상보다 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밥상일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 연세의 어르신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고 있다. 몇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 5남매 중 1년 안에 세 분이 돌아가셨고, 작은어머니까지 포함하면 1년 남짓한 기간에 네 분이 돌아가셨다. 그분들이 가시면서 어려웠던 그때 그 시절도 함께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이제는 그 옛날 혹독했던 가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살고 있는데, 왜 아버지는 과거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셨을까.


우리는 한 사람의 죽음을 가리켜 ‘돌아가신다는 말을 한다. ‘돌아가신다’는 뜻은 왔던 데로 다시 간다’는 뜻이다. 왔던 데로 다시 가기 위해서 우리의 생각들이 자꾸만 어린 시절로 회귀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의 그 친구분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 것처럼. 또 실향민이 고향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종교적인 것과는 다른 차원의 얘기지만, 거꾸로 돌아가는 상태 즉, 우리가 태어나 세상을 인식하기 직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일. 마치 연어가 모천(母川) 회귀본능으로 남대천에서 태어나 자라고 북태평양까지 갔다가, 다시 죽기 전에 남대천으로 돌아와 그 생을 다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이 왔던 데로 다시 돌아가는 결국이 죽음이며, 그 과정 가운데 하나가 황혼의 어린 시절 회상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그 친구분은 아직까지 살아 계실까. 만일 살아 계신다면 이 아버지의 일기를 보여 드리면서 아버지의 그 안타까운 마음을 전해 드리고 싶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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