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익 900점 아무 소용없네
영어는 나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와 같다.
나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동경해 왔다. 그래서 다른 40대 남성과 비교해 적지 않은 돈을 영어에 투자해 왔다. 1대1 원어민 영어회화를 한적도 있고, 1대 1 화상회화, 전화영어, 인공지능(AI) 영어회화 등도 해봤다.
절대로 토익 점수가 영어실력을 입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900점이 넘는(2년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은) 토익점수도 갖고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내 영어실력은 8살 아이 수준도 못 미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나는 미국에만 가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어공부에 매진하겠노라고 다짐을 했었다. 하지만 한달 동안의 내 모습을 반추하면 오히려 영어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지금까지 한달간 미국에서 살면서 느낀 영어에 대한 생각을 몇자 적어보겠다.
1. 막상 영어를 쓸 기회가 많지 않다.
미국에 와보니 영어를 쓸 기회가 진짜 없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에게 '헬로우'라고 말하는 것외에는 영어를 쓸일이 없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영어 기사를 번역하거나 영어 자료를 한글로 바꾸는 일이라서 그런 것 같다. 즉 한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내 일이다보니 영어를 쓸 일이 없다. 아마 미국에 사는 꽤 많은 수의 한인들이 한인들을 대상으로 용역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별로 영어를 쓰지 않는 일을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눈앞에 일이 닥쳐야 불을 켜고 공부를 한다. 학창시절 때 우리가 벼락치기 공부를 했던 것도 내일 앞으로 다가온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함이다. 필요성을 못 느끼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있다. 그저 퇴근하고 나면 샤워를 하고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넷플릭스 시리즈 30분-유튜브 30분 정도 보다가 잠들기 일쑤다.
2. 영어가 들리지가 않는다
식당에 갔을 때 점원이 뭐라고 빠르게 얘기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했다. 한국의 토익시험은 정말 아무 의미가 없다. 분명 점원들이 손님에게 축약어를 쓰거나 슬랭을 쓰지는 않을텐데 나는 그들의 말을 왜 알아듣지 못하는 걸까? 분명 나는 40대 평균 남자들보다 많은 시간을 영어에 할애했는데 왜 내 영어는 이 정도 수준인걸까. 그래서 나는 미국에 온 후에 매우 겸손해졌다. 최근에는 와이프에게 "나 여기 와서 매우 겸손해졌어. 한국에서 너무 까불며 살았어"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 영어를 늘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로 일(work)을 해야 하는 것 같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자기 앞에 닥쳐야 열심히 한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직장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일터. 우리는 24시간 중 직장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더불어 영어에 여러 영역이 있다면 내가 모든 영역을 다 마스터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언어를 마스터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조급함이 줄어들 수 있을 것 같다. 수년 전 '00만 했더니 영어를 마스터 했어요. 00개월만 이 플랫폼을 이용하면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어요'라는 각종 강의들이 난립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런 플랫폼들은 대부분 상술이나 사기(scam)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어에 마스터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단순하게 내 자신을 평가하면 현재 나는 영어를 쓰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 퇴근 후에라도 억지로 영어를 쓰는 환경으로 내 자신을 몰아넣는 수밖에 없다. 맘 같아서는 일주일에 한두시간이라도 원어민 튜터링을 받고 피드백을 주고 받고 싶지만, 여기는 인건비가 너무 비싼 나라다. 당장 다음주부터 아이들의 신학기가 시작되는데 현재 아이들의 영어실력이 부족해서 별도 튜터링을 붙여야 되나 고민이 많은 상황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한달에 백만원 이상의 돈이 술술 빠져 나갈 수도 있다. 나보다는 아이들한테 투자를 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결론은 내가 잠을 줄이고 따로 시간을 내서 영어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다. 내 스스로 영어를 쓰는 환경으로 나를 몰아넣는 수밖에 없다. 내가 관심이 있는 상황을 찾아서 영어 콘텐츠로 찾아보고 거기에 나오는 문장을 읽어보고 입으로 뱉어보는 수밖에 없다. 미국에 오기 전에도 미국에 간다고 영어가 저절로 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 상황의 한 가운데 있으니 답답하다. 째깍째깍 정처없이 시간은 가고 있는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