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bum Track 1. What you believe
나는 종종 ‘듣는 것’에서부터 관계를 맺어왔다.
기숙 생활을 했던 6년 동안은 정말 듣는 일을 즐겼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이 찾아오는 나의 아지트(정직한 직사각형 구조 딱딱한 2층 나무 침대)는 상담 센터를 운영해도 될 정도였다.
친구와 선후배뿐 아니라, 얼통(얼린 몽쉘통통)을 사 먹으러 가면 매점 아주머니가, 스쿨버스가 궁금해서 버스 앞으로 가면 기사 아저씨가, 외출증 없이 밖에 나갔다 오고 싶어서 만난 경비 아저씨, 다 말라가는 식빵에 감자 샐러드 듬뿍 넣은 샌드위치 하나 더 챙겨주시던 식당 아주머니, 사감 선생님과 연습실 관리 선생님까지 그들의 고민이자 넋두리를 듣는 재미가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관계 속에서 오가는 대화를 경청하면서, 나는 잘 말하는 사람보다는 잘 듣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마음을 기울이며 받아들이는 시간을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겼다.
‘경청하기’만큼 잘 하는 일을 꼽으라면 ‘침묵하기’다. 타고났는지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두 성향을 지닌 덕분에 나는 늘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소한 다툼도 기꺼이 피할 수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청은 무책임이 되었고, 침묵은 회피가 되는 순간을 경험했다. 이후로 이 둘은 강점보다 단점으로 작용하는 일이 늘어났다. 아무리 방관하는 경청, 평화를 가장한 침묵이다 하더라도 나는 부딪히는 관계 속 균형을 잃고 싶지 않았다. 또 경청하고 또 침묵했다.
경청과 침묵은 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 단단하게 다져온 내 안의 원만함과 관계에 대한 감정은 세차게 흔들렸다.
균열이었다. 나는 균형을 지키는 대신 균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모난 말 한마디는 하루를 무겁게 만들고, 애써 쌓은 시간은 결국 아무것도 마주하지 못한 채 엷게 금이 가고 있었다. 나는 너무 늦게 배웠다. 이 늦은 감정은 깊고 진하게 번졌다. 그리고 끈질기게 스며들었다. 2024년 3월 즈음, 이런 생각들이 맞물려 이 곡의 가사로 이어졌다.
관계의 흔들림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경청과 침묵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침묵과 경청하는 태도를 수행한다. 특히, 침묵의 강한 힘을 알고 있다. 남의 흠집과 같은 불필요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절대 침묵하시는 스승님에게 배웠다. 그건 바로,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관계가 뒤틀리고 신뢰가 흔들리면, 크고 작은 오해가 생긴다.
그 오해는 갈등이 되고, 더 큰 진실은 외면당한다.
나의 침묵은 어떤 사람에게는 배려와 기다림이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무관심이었다. 이렇게 같은 장면이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 때 관계는 어긋난다. ‘전하려는 마음’과 ‘전해지는 마음’ 사이에는 오해가 끼어들고, 이해했다는 믿음은 쉽게 깨지고 만다.
우리는, 어떤 진실을 보고 있는 걸까?
우리는, 같은 진실을 보고 있는 걸까?
삶은 동일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이기적인 존재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며,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잘 듣는다’라고 하지만, 믿고 싶은 대로 해석하고, 보고 싶은 모습만 기억하던 시간들이 있다. 이해하고 있다는 침묵으로, 서로를 속이고 또 속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얼마나 주관적인지,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는 말이 있다. 관계 안에서 상처받고, 머뭇거리고, 돌아서던 나도 대부분 내 안에서 실마리를 찾곤 한다.
결국, 모든 답은 각자의 내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