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나기 전에, 어떤 사람과 2년쯤 사귄 적 있다. 그때도 나는,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 그 관계의 사후 세계를 자꾸만 염탐하였다. 그런 나와 달리, 그 사람은 살아 있는 어떤 관계 안에서 아직 살아 있는 것들과 어울리는 데만 몰두하였다.
그 사람의 마음은 관계의 운명에 저지당하지 않았다.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았고, 그것에 굴복하지도 않았다. 그것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것에게 주권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 사람은 ‘모두가 언젠가는 헤어진다.’라는 운명 앞에 엎드려 있지 않았다. 그 운명이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뭐든지 열심히 했다. 그 사람은 그 운명에 겁먹지 않았다. 그 운명이 자기 사랑보다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그 운명에 지지 않았다.
나는 아직 숨을 거두지 않은 관계들을 쉽게 버렸다. 그것들이 어차피 죽어 없어질 거라는 이유로.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관계들을 최대한 정성껏, 최대한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으려고 했다. 그것들이 어차피 죽어 없어질 거라는 이유로.
그때 나는 내가 현명한 줄 알았다. 내가 똑똑하게 나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와 일찍 헤어지는 만큼, 이별의 아픔이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당시 나는, 내가 다치지 않는 것에만 온 신경을 썼다. 이별 그 자체가 나를 다치게 하는 게 아니라, 관계에 대한 내 망상들과 집착들이 나를 다치게 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약삭빠르게 도망치는 것이 최선인 줄 알았다.
그 사람과 내 관계 때문에 내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 사람은 나를 붙들고 말했다. 살아 있을 때는 살아 있는 것들만 붙들고 살자고. 죽은 것들을 움켜쥐지 말고. 생이라는 것이 소멸하는 순간은 아주 잠깐이지만, 생 자체는 얼마나 기냐고. 찰나의 소멸에 사로잡혀 긴긴 생을 허비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고.
그러니 숨이 붙어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살아 있고, 마음에 온기가 남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사랑하자고. 자긴 그러고 싶다고.
그 사람은 오직 이 순간, 이 순간만을 살았다. 그 사람은 지나간 순간에 남아 있는 것들을 이 순간으로 가져오려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순간에 있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이 순간으로 데려오려 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자유로웠다.
사라져 가는 것들은 사라져 가는 대로 두고, 생겨나는 것들은 생겨나는 대로 두고, 그 사람은 오늘을 만끽하였다.
그 사람은 죽어가는 것들 때문에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 이 세계가 덧없는 세계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사람은 태어나는 것들 때문에 크게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은 탄생과 소멸을 동등하게 대했다. 그래서 다만 침착하고 평화로웠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고, 그 사람을 존경했지만, 그 사람을 떠났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여전히 소멸하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 사람은 나를 가만히 보냈다. 가만히.
나도 그 사람처럼 누군가를 담담하고 단단하게 만나고 싶다는 바람은 계속 있었다. 그 바람보다 내 불안과 두려움이 더 컸을 뿐이다.
그러다가 당신을 만났다. 나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는….
이 글은 소설집 《그 사람은 그 운명에 지지 않았다》에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