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실패없는 도전
지금은 한국 학교 강의 분위기가 어떤지 몰라도, 한국에서 학교 다녔던 내 또래의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수업 시간에 뭔가 먹다가 혼난 경험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한번이라도 미국 수업 풍경을 본 적이 있다면 '자유로워 보이네'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학교를 다닐때에도 수업 중에 커피나 간단한 간식을 먹기도 하고, 의자에 비스듬이 앉아서 다리를 꼬아서 교수에게 질문하거나, 책상위에 앉아서 수업에 참여한다거나 하는 모습들을 보면 처음에는 '저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이런 행동들이 단지 '미국인들에게는 무례함으로 느껴지지 않는 문화 차이' 라고 단순히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좀 더 깊은 관계가 설정 되어있던 것이더라. 교수 입장에서는 학생들이 본인의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그들이 수업 중에 뭔가를 배울 수만 있다면 그 외 부수적인 것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 같다. 수업 중에 커피를 마시는 것은 '수업 중에 예의 없는 일'이 아니라, '카페인이 필요할 정도로 공부에 집중하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무언가를 먹는 일도 '강의실에서 매너없게 뭐하는 짓이냐'가 아니라, '끼니를 거를 정도로 공부하느라 바빴나보네'라는 기본적인 신뢰가 교수와 학생간에 설정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업중에 '교수님 커피 한잔 하고 와도 되나요?' 라는 질문 따위는 전혀 필요 없는 셈이다.
학생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교수는 학생의 생각을 존중해주고 최대한 그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한다. 한국에서는 덜 다듬어진 아이디어를 가지고 교수와 상의를 하게되면 '음... 그건 좀 아닌것 같은데? 이런 방향은 어떨까?' 라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을텐데, 여기서는 단 한번도 그런 교수를 본 적이 없었다. 학생이 낸 아이디어에 대해서 교수가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학생의 능력을 신뢰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네가 하고 싶은거 다해봐라, 내가 도울테니' 라는 적극적인 교수의 지지가 학생들의 잠재 가능성과 능력을 최대한도로 이끌어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신뢰의 관계는 나중에 회사 생활에서도 여러방면으로 이어지는데, 예전에 미국에서 디자이너로 일한다는 것에도 적어둔 것 처럼, 본인의 업무 퍼포먼스에만 집중하고 출퇴근 시간같은 부수적인 것들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도 회사와 조직원, 매니져와 팀원들 간에 깊은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한번이라도 신뢰를 잃게 된다면 그 타격은 어마어마 하다)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녔을때에는 한 학기당 3~5개의 수업을 들었고, 각 수업은 2~4개의 프로젝트로 이루어져있다. 일반적으로 함께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팀을 이루어서 장단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프로젝트가 종료될 때마다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식이었다. 크게 보면 내가 겪었던 한국 대학교 강의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었는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적잖게 다른점들이 보인다.
Design & Tech 쪽을 공부했던 나의 경험을 예로 들면- 한국에서는 주로 교수님이 앞에서 강의를 하면 학생들은 그 내용을 보고 듣거나 받아 적는 등의 이른바 '진도'를 나가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프로젝트 진행 후에 프리젠테이션 하는 것은 미국의 학교와 비슷하다. 프로젝트의 주제가 학생들에게 주어지면 학생들은 본인의 역량을 발휘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발표를 한다. 그런데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는지 보이게 되어 본의 아니게 학생들을 줄 세우는 결과가 된다. 결국 교육이 학생들 작업의 높은 퀄리티(High-Quality)를 요구하게 된다.
반면에 내가 다녔던 대학원에서는 커다란 테마에 관하여 교수가 화두를 던지거나 큰 컨셉을 이야기 하면서 다양한 레퍼런스를 보여주면, 학생들은 서로의 생각을 아무런 제한 없이 나누고 덧붙이는 형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때로는 토론만 하다가 강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학생들이 진행하는 프로젝트 역시 다양한 시각으로 이루어져서 학생과 교수간의 여러가지 이야기꺼리를 제공한다. 프로젝트의 주제도 교수가 던져주기보다는 학생들 스스로 찾아서 교수와 1:1 상의를 하며 본인이 정한다. 당연히 다양한 주제 만큼이나 결과물도 천차만별인데, 교수는 작업물의 완성도를 가지고 학생을 평가하지 않는다. 물론 완성도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긴 하는데, 결과물의 완성도 보다는 아이디어와 생각의 전개의 탄탄함- 그 프로세스의 완성도에 대해서 주로 언급한다. 결과물의 완성도에 대해서 자유롭다보니, 프로젝트에 임하는 학생들의 아이디어에는 날개가 달린다.
프로젝트가 끝까지 잘 완성해서 마무리 되던지, 아니면 시행착오의 연속으로 끝까지 완성을 못하고 마무리되던지, 교수는 '너 이따위로 해서 성적 받을래?' 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래서, 어떤 부분에서 부족했지?', '초반 기획 단계에서 알 수 없었던, 실제로 작업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은 뭐였지?' 라고 물어보면서 프로젝트에 대한 꾸지람 보다는,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워나가길 원한다. 내가 무척 좋아했던 한 교수님은 실패에 대해서 "Failure does not mean that you could not make it. If you could not make something, it is not failure but it is experiment. But if you could not learn from experiments, that is failure. (실패는 너가 무언가를 끝까지 해내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실험이다. 만약 너가 실험으로부터 뭔가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실패다)" 라고 학생들에게 늘 강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없고 배움이 없는 학생은 꾸지람을 듣고 비판을 받았지만, 다양한 방식의 아이디어 실험은 언제나 환영 받았다.
위에 적어놓은 소제목이 너무 이상한게 아닌가 싶겠지만, 정말 그랬었다. 학기중에 아무도 성적에 관심이 없었다. 단순한 이유였는데- 성적 시스템이 P/F(Pass or Fail) 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월등히 뛰어나게 잘해도 Pass, 적당히 잘해도 Pass, 좀 못했지만 Mininum Requirement를 충족시키면 Pass를 주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한 남들과의 경쟁이 무의미해진다.
이렇게 되면 공부를 별로 안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 반대였다. 다른 학생들과 경쟁 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자연스럽게 학생들끼리 협력이 이루어지게 되고, 각자 아는 것들과 잘 하는 것들을 서로 공유하는 문화가 생겼다. 그 예로 우리 학과의 경우에는 매주 목요일마다 수업 이후 밤 9:00부터 한 시간 동안 학생들끼리 Skill Share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가령 어떤 날은 디자이너가 비디자이너들(Non-Designer)에게 포토샵을 가르쳐 준다던가, 또 어떤 날은 프로그램에 능한 학생이 초보자들을 위해서 여러가지 코딩의 팁들을 알려주는 세션이 있었다. 정규 수업시간에 배우지 못했던 디테일한 내용들을 이 시간을 통해서 많이 배울 수 있어서 많은 학생들이 밤늦도록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이외에도 학생들끼리 자유롭게 필요에 따라 "혹시 XXXXX 해본 적 있는 사람?" 이라고 메일 리스트에 질문을 올리면, 이전에 경험했던 사람이나 혹은 같은 어려움을 느꼈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이메일 thread를 만들어 가면서 지식이 축적되기도 한다.
대학원 성적 시스템이 A/B/C/D/F 가 아니라 P/F가 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학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산업 현장에서도 성적표가 필요없는 환경이 뒷받침 해줘야 한다. 그 예로 졸업 즈음에 몇 군데의 IT기업에 입사 지원을 했었는데, 성적표 제출이 의무가 아니었고 졸업 증명서만 첨부하면 되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서류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입사가 확정된 뒤에 신분 확인차 참고 서류로 별도로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회사가 지원자의 능력을 평가할때 성적표가 당락을 결정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학기 중에 들었던 모든 수업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했던 것은 Documentation 이었다. 일종의 '기록을 남기는 일'이었는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생각했던 아이디어, 발견했던 문제점, 읽었던 참고 서적, 여러가지로 시도했었던 실험 내용들을 가감없이 개인 블로그에 올리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2학년 선배들이 Information Session을 열어서 어떻게 개인 블로그를 개설하고 운영하는지 상세하게 안내해주었다. 특히나 인터넷 관련하여 웹서핑만 할 줄 아는 '컴맹'들을 위해서 도메인을 구입하고 서버를 개설하고 홈페이지를 설치하는 과정 하나하나를 무척이나 상세하게 영어로 어렵게 설명해주었다.
개인 블로그에 남긴 Project development process는 담당 교수들이 해당 프로젝트들을 매주 확인하면서 학생과 1:1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어차피 성적도 의미가 없는 마당에 학생들 모두가 그렇게 블로그에 documentation 하는데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교수와의 커뮤니케이션 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은 어떤 프로젝트를 어떤 아이디어로 접근했는지 들여다보면서 본인의 생각을 나눠줄 수도 있고, 자신의 부족했던 부분에 대해서 답을 얻게되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그리고 documentation의 가장 큰 장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블로그에 글을 남기면서 역으로 본인의 아이디어나 생각의 전개 과정이 탄탄하게 정리가 된다는 것이다. 글을 남긴다는 것은 의식의 흐름대로 끄적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형식과 흐름을 정리 해야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과정에서 다시한번 내가 했던 프로젝트 과정들이 오롯이 내 것으로 흡수된다. 디자이너인 내게는 특히 프로젝트 진행 과정의 상세한 기록들이 나중에 포트폴리오 제작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블로그를 통한 공유만큼이나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이 바로 수업시간에 이루어지는 토론이다. 한국에서는 수업 중에 누군가 질문을 하는 모습도 찾기 어려웠지만, 반대로 이 곳에서는 질문하지 않는 학생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처음에는 '뭐 저런 것 까지도 물어보나...'라고 생각했던 나 역시, 나중에는 토론에 깊게 빠져들정도로 토론의 과정은 그 자체로도 매력이 있다.
수업시간 중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토론은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많은 가능성들을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정답이 없이 토론이 끝나는 경우도 많았다. 정답이 없는 토론은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오히려 정답에 가까운 이야기들과 정답과는 멀어보이는 이야기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더 새로운 아이디어, 더 새로운 문제, 더 새로운 해결책들이 떠오르게 된다. 처음부터 토론을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해버리면, 토론 참여자 스스로 정답이 아닐것 같은 이야기를 재단해버리기 때문에 토론의 생산성이 오히려 떨어진다.
한두시간 격론을 벌이다가 끝내지 못한채 수업 후에 강의실 뒷편에 서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 하면서 생각은 나누어지고 보태져서 힘을 얻게된다. '정답이 뭘까?' 라는 고민을 하지않기 때문에 다양한 생각들이 밖으로 나오게 되고, 질문자 스스로 그 안에서 정답을 찾아가는 선순환 구조가 생기게 된다.
1. 우리의 교육이 더 나아질 수 있을까?
2.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실패없는 도전 (현재 글)
3. 팀으로써 함께 성장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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