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교도소 내의 특수 보직을 맡게 된 주인공이 문을 걸어 잠근 채 교도소 전체에 모차르트의 오페라 2중창 아리아를 방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감자들은 모차르트를 알건 모르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정적 속에 듣고만 있다. ‘이 두 이탈리아 여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때로는 말하지 않은 채로 남겨지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우리는 짧았던 그 순간 모두 자유를 느꼈다’ 라는 독백이 담긴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초기, 통째로 자가 격리된 이탈리아의 한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각자의 발코니에 나와, 서로 멀리 떨어진 채로 냄비와 그릇을 악기 삼아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이 영상화된 적이 있다. 가로로 긴 아파트 구조에 서로의 얼굴도 잘 보지 못하고, 대체 내가 누구와 춤추고 노래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화음을 맞추고 장단을 맞추며 험난한 시절을 잠시라도 비웃어보게 한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그 순간을 지나고 난 후, 그들은 어찌 되었을까? 음악을 감상하거나 연주했다고 해서 바로 개선되는 현실이란 별반 없다. 교도소에서 탈출할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팬데믹의 위험이 덜어질 리도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견뎌야 할 지독한 시간’이라는 것이 총량 법칙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 시간을 치유하거나 대면할 용기, 정화할 여지를 음악을 통해 넘볼 수는 있다. 이것의 크기를 우리는 어떻게 가늠하고 있는가?
요한 세바스찬 바하는 18세기 대유행했던 감염병으로 20명의 자녀 중 절반을 잃었다. 바하는 고통에 직면하여 칸타타 <제 몸은 성한 곳 없고, 작품번호 25>를 작곡한다. ‘모든 세상이 병상이다. 누가 고통에 있는 나를 치유하며 나를 회복시킬까’ 등의 테너 독백을 통하여 시대가 처했던 감염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프랑스의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는 1918년 스페인에 닥쳤던 팬데믹을 겪는 도중, 도처에 쌓여가는 시체의 참혹함을 목격하고 <플룻, 오보에,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작품번호 47>을 작곡하여 희생자들을 추모하였다. 각 악기들이 수많은 임시표를 고통스레 쌓아 올리며 얽혀가는 구조가 흡사 그들이 겪었던 참담했던 시기와도 같다. 마지막 악장에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강렬함 대신 장송 비가를 배치하여 그가 전하고 싶던 음악적 치유의 기능을 마주하게 한다.
올리비에 메시앙은 프랑스의 작곡가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소에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한다. 공포로 얼룩진 삶을 연명하던 그는, 연필과 종이를 어렵게 얻어내어 8악장의 대작을 작곡한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이다. 1941년 1월, 피아노를 맡은 메시앙은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을 연주할 수 있었던 3명의 수용소 동료들과 함께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안고 5천 명 수용자 앞에서 이 작품을 초연하였다. 모두 포로 신세인 네 명의 연주자와 5천 명 수용자들이, 죽고 사는 것이 1분 1초 불안했을 전쟁터 수용소에서 일으켜낸 기적. 절망으로 잠식되기를 거부한다 선언하듯 탄생한 이 작품은 존재 자체로 경이로움을 넘어선다.
이렇듯, 음악은 우리의 위기상황에 “반응과 작용”을 한다. 닥쳐온 위기에 고통을 부르짖던, 치유를 건네던, 희망을 갖겠다 선언을 하던. 그것이 감염병이나 전쟁 같은 거대한 것이 아니더라도, 밤마다 아무도 모르는 영문으로 울어대는 갓난아기에게 어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의 평안함조차 음악의, 예술의 작용이다.
음악의 한 사전적인 풀이는 이렇다. “박자, 가락, 음성 따위를 갖가지 형식으로 조화하고 결합하여, 목소리나 악기를 통하여 사상 또는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
수많은 위기가 닥칠 때, 그 혼돈 속에서 우리가 사상과 감정의 소통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가, 아닌가 귀하에게 묻고 싶다. 아, 물론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궁금해서 묻고 싶다.
과연, 시절 좋을 때 하는 것이 예술인가?
시절 좋을 때와 시절 나쁠 때, 우리는 언제 더 예술이 필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