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인터내셔널 피아노 인터뷰
1999년 여름 석사과정을 밟으러 간 텍사스 오스틴 주립대 캠퍼스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 뒤로 9년 후 우리가 결혼하게 되리라고는 둘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낯선 사람이나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유달리 힘들어하는 나는, 가족으로부터 뚝 떨어져 혼자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유학 생활 초기가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그렇게 의기소침하던 나와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남편은 누군가 실내악 연주를 하면 제일 자주 보이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이었다. 큰 키에 마르고 구부정한 자세로 언제나 쾌활하고 즐거워 보였던, 그 해 학교 내 유일한 일본계 미국인 학생이었다. 우리가 처음 인사 외의 대화를 나누었던 건 일 년쯤 지난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반주 레슨을 기다리며 교수 연구실이 몰려 있는 복도 커다란 녹색 카우치에 파묻혀 앉아있던 나에게 남편이 말을 걸면서 시작됐다. “반주 레슨 기다리니?”라는 그의 질문에 “응, 난 반주가 싫어”라는 쓸데없는 대답을 하고 말았다. 왜 나는 물어보지도 않은 대답을 한 걸까 스스로도 어리둥절했었다.
그 후 박사과정이 완전히 끝난 5년 후까지 그와 나는 정말 좋은 친구로 지냈다. 그는 연주 전 무대 리허설에서 들어달라고 부탁하기에 가장 신뢰가 가는 친구였고, 해결이 안나 답답한 프레이즈들을 맞닥뜨렸을 때, 제일 먼저 도움을 청하고픈 친구였다. 반주가 싫다고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던 나에게, 같이 하는 연주가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지, 얼마나 나 자신의 음악에 도움이 되는지 알려 준 친구이기도 하다. 또 걱정이나 고민을 털어놓고 나면, 특유의 유머로 내 고민이 별로 심각하지 않은 것인가 의심하게 만들어, 고민의 무게들을 덜어내주곤 했다. 마지막 렉처 리사이틀이었던 드뷔시의 <프렐류드 1권>을 준비하면서, 열흘 남짓 후인데 뭔가 아직 정리가 안된 것 같다며 패닉 상태가 되어 걱정하는 나에게, 베토벤 소나타가 아직 준비가 안된 것보다는 훨씬 좋은 상황이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그 순간 둘이 웃음이 터졌었고, 왠지 안심하며 연습실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한국식으로 교육받고 예중, 예고를 거치며 여느 동기 선배들과 같이 언제나 크고 작은 실기시험과 연주를 요구받으며 성장했던 나는, -그 때문이라고 하기엔 조금 미안한 감이 있지만-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나 관심사가 좁은 편이었다. 남편은 이런 나와는 완전히 성향이 달라, 크고 작은 주제들에 항상 촉을 세우고 반응을 한다. 발표해야 할 컨퍼런스로 가는 비행기 시간이 빠듯한데도 임종을 앞둔 이웃 할머님에게 달려가 부탁받은 녹턴을 들려주고, 홈리스 아이들을 위한 쉼터에서 음악회를 열어주려 궁리하는 그런 사람이다. 처음에는 그저 그 에너지가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나도 나의 미미함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힘껏 돕고자 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는 걸 느낀다.
지난 9월 서울, 순천, 광주에서 세 번에 걸쳐 열렸던 듀오 연주회는 당분간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결혼 후 각각 한국과 미국에서 직업을 잡고 방학 때만 만나는 생활을 이어가다, 올해 남편이 교환교수로 한국에 오면서 처음으로 2개월 이상의 시간들을 같이 할 수 있게 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기획했던 음악회였다. 무대로 나가기 직전 “I will totally rely on you”라고 말할 수 있는 상대와 함께 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참 기뻤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남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가끔 리허설 때 서로 선을 심하게 넘는 일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 치열하게 집중하고 난 후에 그것이 교훈이든 반추이든 얻은 것이 많다. 서로 파트너로서 아이디어를 나누고, 밸런스를 맞추고, 타이밍을 맞추고, 서로 무례할 정도로 날을 세우다가도 최선을 찾아내는 과정들에서 유독 배우고 남은 게 많은 연주였다.
피아니스트 부부라고 하면 우리의 일상이나 대화의 많은 부분이 음악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음악 하는 사람 둘이 함께 산다는 건, 고맙게도 때로 적절한 타이밍에 음악에서 멀리 벗어날 수 있게 하기도 하고, 음악으로 더 가까이 올 수도 있게 하는 것 같다.
내가 지금도 행운이라고 여기는 건, 학창 시절을 같이 보내 나의 인간적, 음악적인 굴곡과 성장을 어떤 거름장치도 없이 모두 나누었던 사람과 함께하면서 그 어리고 화창했던 시절에 같이 했던 것들을 지금도 같은 마음으로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내 또는 친구이기 이전에 그저 한 사람으로서의 나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주고, 위로와 용기와 신뢰를 지원해주는 남편이 있어 견뎌야 했던 것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음악을 하는 것’이 언제나의 꿈이다. 아직 길이 안 보일 만큼 멀었고, 끝날 수가 없는 꿈이지만,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좋은 음악을 하는 것’ 모두에 더 할 수 없는 파트너인 그가 있어 항상 감사하다.
텍사스 오스틴 주립대에 박사과정을 밟으러 간 첫 해, 아내를 처음 만났다. 몇 개월쯤 지난 후 반주 레슨을 기다리며 복도에 앉아있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고, 반주나 실내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기억하고 있다. 실내악이나 반주를 안 좋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도 못한 나는 조금은 충격적이기도 했고, 신선하기도 했다. 지금은 실내악을 매우 사랑하는 아내를 보면, 그 당시 내가 얼마나 열심히 아내를 설득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아내와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매우 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다. 여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항상 음악 이야기만 하면서 지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음악 이야기로 본격적으로 들어갈 때면 나는 곧 어렵지 않게 둘만의 공감 지점을 찾아내곤 했다. 또 그녀는 별로 구체적이지도 못했던 나의 음악적인 생각들과 이론들을 듣는 걸 즐겨했다. 스포츠 광인 내가 여러 스포츠와 피아노 연주의 비슷한 점에 대해 열심히 설명할 때조차, 재미있게 들어줬다. 내가 그 당시 푹 빠져 있던 레퍼토리들을 여러 가지 다른 버전의 레코딩을 가지고 와 함께 듣기도 했다. 그때 같이 들었던 베를린 필하모닉과 에밀 길레스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아직도 아내와 같이 듣기에 전혀 질리지 않는 레코딩 중 하나이다. 리사이틀이나 심사를 앞두고 서로 들어주고 조언해주던 습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05년, 6년간의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아내가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갔을 때, 나는 매우 허전했다. 한국으로 돌아간 초기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나가보는 세상에 겁을 먹은 그녀와 이메일과 전화로 계속 안부를 주고받으며 안심시켜주려고 노력했다. 때로 아내가 리사이틀 레코딩을 이메일로 보내주어 한국에서의 그녀의 연주도 가끔은 들어 볼 수 있었다. 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계속 성장하고 있는 아내와 아내의 음악이 매우 뿌듯했다. 그녀가 보내준 브람스의 <슈만 변주곡>이 특히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성장하고 있는 친구를 보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음악 외의 관심거리도 무수히 많은 편인 나에게 음악에만 집중하고 있는 아내를 계속 보고 있는 것은 나의 동기에도 자극이 되곤 했다.
2008년 결혼 후, 벌써 6년째에 접어들었다. 우리 둘 다 학위를 마친 후 거의 10년을 돌이켜보면, 그동안의 시간이 각각의 음악을 만들어 가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구나 깨닫는다. 최근 아내와 함께한 듀오 피아노 연주회를 준비하면서 특히 많이 느꼈다. 다른 점이 굉장히 많은 둘 사이의 음악에, 또 콘서트 준비 자체에 대한 접근방법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매우 한결같고 견고한 편인 아내와 다르게 나는 좀 더 모험적이고 움직이는 편이다. 몇 마디로 가려내기 불가능한 이런저런 차이점들을 서로 맞춰가는 과정 자체가 아내와 남편으로서도, 두 명의 다른 피아니스트로서도 하나의 성취였던 것 같다.
나 자신을 가장 많이 오픈할 수 있는 사람과 인생의 계획들을 같이 할 수 있어 행운이다. 일상에서건 음악에서건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포용하고 즐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2014년 10월
인터내셔널 피아노 "Double Acts, 피아니스트 박재연&나오키 하쿠타니"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