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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ry J Aug 08. 2022

길모퉁이로 온 앤 셜리

35년 만에 다시 <빨간머리 앤>

불면증에 시달리던 어느 날 ‘수면에 도움이 되는’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다가 <잠잘 때 듣는 빨간머리 앤> 오디오북을 듣게 되었다. 평온함이 목적인 모노톤 리딩에 대한 반작용인지, 갑자기 누구보다 높낮이 뚜렷했던 책 속 앤 셜리가 그리워졌다. 제일 빨리 배송되는 사이트를 찾아 주섬주섬 주문을 했다.

책이 도착하고 목차를 훑는데 어떤 챕터의 제목은 얼핏 기억이 나기도 한다. 밤마다 조금씩 읽어내려가며 흐릿했던 이야기의 기억들이 선명해지면서, 웃음이 터지다 눈물이 핑 돌다 한다. “아아 마릴라 아주머니!” 라던가, “저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어요!” 같은 한껏 과장된 앤의 말투가 반갑고, ‘자기 전 침대에 넣어주는 따뜻한 물주머니’나 ‘지하실에 있는 자두 절임’ 같은 본 적 없는 것들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우리나라에는 <빨간머리 앤>으로 번역되어 들어왔지만 사실 원제목은 <초록색 지붕 집의 앤>이다. 앤이 빨간머리에 얼마나 컴플렉스가 있는지 모르기도 쉽지 않은데, 왜 굳이 빨간머리로 앤을 수식했는지 조금은 불만이다. 낭만적인 것에 목숨을 거는 앤에게는 원제목인 <초록색 지붕 집의 앤> 이 훨씬 더 어울리는데 말이다.

석판으로 시원하게 내리쳤던 길버트와의 화해를 마지막으로 책은 끝나지만, 사실 <빨간머리 앤>은 10권까지 이어지는 앤 전집의 1권이다.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그 열 권을 무슨 습관처럼 읽었다.

앤은 문학사가 되고, 교장선생님이 되고, 의사가 된 길버트와 결혼을 한 후, 여섯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 전집은 앤의 가족과 마을 친구들의 온갖 대소사를 시시콜콜히 털어놓은 후, 마지막 10권 <앤의 딸 리라>에서 앤의 가장 아름다운 딸, 막내 리라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빨간머리 앤>을 다 읽고 난 후 다시 한번 전집이 읽고 싶어졌다.  구하는 게 쉽지 않아 서서히 잊어갈 무렵, 선뜻 옛날 책들을 빌려줄 수 있다는 교수님이 있어 그 무거운 열 권을 받아 들고 왔다. 시기적절하게 그날 저녁 코로나 확진이 되는 바람에 나는 격리 1주일 동안 바이러스와 앤 셜리를 뜨끈하게 품고 살았다.


35년 전에는 몰랐던 어색한 번역체들 - 앤이 ‘나물반찬’을 만들어 먹고 레슬리는 ‘순회문고’에서 책을 빌려보는 - 에 웃음과 기침이 함께 터지기도 하고, 앤에게 10명의 아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집이 10권이었다는 것을 힘없이 기억해 내기도 한다. 어른이 된 앤이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음에 안도했지만, 현실감각을 키우지 못했음이 안타깝기도 하다.  어릴 때의 나는 앤이 아내가 되어도 어머니가 되어도 동경했지만, 사십대 중반의 나는 마침 '현실 전염병' 코로나에  굴복하기 직전이다 보니, 세상과 동떨어져 마냥 낭만적이기만 한 앤이 책 속인데도 염려가 되나 보다.


전집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문구.

“그런데 걷다 보니 길모퉁이에 이르렀어요.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


우연히도, 나 또한 이제 막 못 보던 길로 이어지는 길모퉁이에 서있다.

거기에 서서 불면증에 지려던 나에게 조그만 앤 셜리가 다시 찾아왔다.

이 말을 전하려고 35년 만에 일부러 온 것임을 나는 조금도 의심치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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