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기록 5 - 2018년의 JY
음악에 대해 싫은 소리라도 경험하고 싶은 순수함으로 가득했던 학생이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 순수함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나, 모든 대화의 어미는 ‘다나까’체로 바뀌어 있었다.
이 아이의 인사는 다른 학생들보다 약 2초 정도 길다. 일단 가던 걸음을 멈춘 후, ‘안녕하십니까’와 동시에 허리를 숙이는 느긋한 동작, 미소 띤 얼굴이 3단 콤보 한 세트를 이룬다. 태어나 먹은 끼니 수 보다도 더 많이 듣고 쓰는 말이지만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에서 진정성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 아이는 정말 상대가 안녕한지를 챙기고 있는 인사를 한다. 그래서 시간에 쫓겨 복도를 전력 질주하다가도 이 아이의 인사에는 웬만하면 나도 급브레이크로 멈춰 서서 ‘너도 안녕하니’ 응답한 후 질주를 재개하곤 했다.
어느 날, 학기 말 상담 중 요즘 특별히 어려운 과목은 없는지를 물었었다.
뜻밖의 대답이 나온다. 화성학. 어렵다기보다 마음으로부터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화성학 선생님께서는 감 7화음은 그 뒤에 반드시 해결 화음이 와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왜 해결이 꼭 되어야 되는지 모르겠는 겁니다. 감 7화음은 그냥 듣고만 있어도 너무 좋은데 그냥 그대로 두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그 순간 내 학생 중 이런 말을 하는 학생이 있었다는 걸 할머니가 되어서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감 7화음을 그냥 두고 싶은 학생의 고민이, 나에게는 박카스로 세수를 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도록 청량했다.
나는 대학시절 화성학 수업에서 네 학기 모두 A를 받았던 듯하다. 그러니 아마도 감 7화음을 해결해 내는 것쯤은 거의 자동화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음악이 내 삶에 무엇을 해줄까를 생각하느라 음악 본연의 아름다움이나 맥락에 대해서는 별 궁금한 것이 없었다. "해결되지 않는 감 7화음이 연속될 때의 아름다움은 어쩌라고?" 같은 생각을 화성학 수업을 들으며 해 본 적이 없다.
그런 것을 알아보고 집착할 만한 음악에 대한 진심은 훨씬 뒤 얼마만큼의 고통을 치른 후 자라났다. 그러나 이 아이는 스스로 진심이라는 옷을 이미 입고 있다.
교과상담 후 진로상담으로 가야 할 길이 감 7화음 이후 완전히 경로를 이탈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쉼 없이 나누었다.
네가 가진 마음을 ‘진심’이라고 한다. 진심이 언제나 통하는 세상이 아니라고 해도, 그것과 상관없이 너는 적어도 너의 진가를 꼭 알길 바란다.
이 아이는 아마 내가 한 말을 그 순간 다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이미 잊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학생이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악보를 보는 것부터 버거웠던 학생이 음악에 대한 진정성 하나로 더디지만 분명하게 성장해가던 4년을 지켜본 것은 말 그대로 행운이었다. 이 아이 덕분에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음악을 하고 싶다는 나의 꿈이 가끔 기억이라도 났다. 팔이 안 움직일 정도로 연습하여 당당하게 A+를 거머쥐었던 이 아이의 졸업연주를 보며, 이런 귀한 학생을 가져봤음이 내 인생에도 값진 재산으로 남을 것임을 확신했다.
졸업 연주를 마치고 몇 시간 후 전화가 왔다. 없는 말주변의 최대치를 발휘하느라 애를 쓴다. 어떻게든 문자나 편지로 써보고 싶었지만, 너무 감사한 마음에 할 말이 찾아지지 않아 일단 무작정 전화를 했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고 답해주었다. 나도 내가 너의 선생인 것이 너무 감사해서 무어라 할 말을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 아이가 어떤 어른이 되어 가는지 드문드문 지켜볼 것이다. 해결하고 싶지 않은 감 7화음에 담았던 진심,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반복하는 '안녕하십니까'에조차 담은 진심을 누군가가 크게 건져내어 귀하게 쓰기를, 마음 다해 소망하며 지켜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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