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기록 4 - 2022년의 M
평점 4.5, 그러니까 전과목 A+를 받을 때도 있는 모범생이지만,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4학년 학생이 있다.
공부도 연습도 너무나 열심히 하지만, 2년 전 처음 이 학생을 받았을 때는, 레슨 자체가 쉽지만은 않았다. 부족한 학생의 상상력을 메우느라 교수는 항상 도입 설명이 길어지고, 수업과 집도의 중간쯤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들 중, 작년이던가, 어쩌다 마음을 터놓은 아이는 빨리 안정적인 교사가 되어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모시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라며 울음을 터뜨렸었다. 교사가 되고 싶은 너의 이유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너는 분명 가까운 시일 내 임용고사를 우수하게 합격하여 교사가 된다, 그러나, 네가 앞으로 평생 가르칠 것은 마음을 담지 않으면 할 수도 가르칠 수도 없는 음악인데 이 문제는 어떡하면 좋을까 물었다.
음악이 재밌지 않고, 실기시험 한 번 보려고 그토록 오랜 시간 연습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잘 찾지 못하겠고, 이걸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날 레슨시간을 훌쩍 넘겨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밤, 아이는 마음을 눌러담은 듯한 힘겨운 카톡을 보내왔다. 나는 그 카톡을 오래도록 들여다 보았다. 그때부터 이 아이의 레슨 시간은 조금씩, 그러나 확연히 달라져갔다. 선생인 나도, 학생인 그도, 1주일에 30분 뿐인 그 수업시간의 밀도를 버겁도록 밀어부쳤다. 그 학기의 거쉬인 콘체르토를 잊을 수 없다. 여전히 부족한 상상력이지만, “재미”라는 것을 붙여가고 있는 것이 선생인 내 귀에 확연히 들려온다. 재밌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몸짓들이 보여온다. 실기시험 전 마지막 레슨 때 나도 그 아이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겠다.
그랬던 이 아이가 4학년 졸업연주를 위해 도전한 프로코피에프 소나타에 꽤 오래 고전하고 있다. 나는 그간 쓴 소리를 쏟아내면서도, 언젠가 어느 레슨에 분명히 확 달라진 모습으로 오리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그 날이 드디어 오늘이었다.
그러나 열심히도 쳐대는 아이의 온 몸에서, 본인이 재밌어서가 아닌, 선생이 즐기자고 했으니 꼭 즐기고 말겠다는, 무언가 잘못된 의지가 활활 보인다.
끝음을 누르고 난 후, 너무 좋아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나의 말에 학생은 또 눈물을 쏟았다.
조금 기다리다 묻고 싶은 것을 물었다. "혹시 지금 즐기기 미션을 수행하는 건 아니니?"
"그런 것도 같아요" 목메인 대답을 받았다.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여러 말을 나눌 상황이 아니라 곧 레슨을 시작했지만, 이것만은 급히 약속했다.
"너는 곧 이 곡을 사랑하게 돼. 네가 이만큼 고민하고, 연습하고, 시간을 쏟았으면 곧 그렇게 돼. 그러고나면 즐기기 미션이 아니라 정말 즐길 수 있게 돼. 연주 전에 꼭 그 날이 와"
즐기는 것조차 수행대상으로 결심하는 학생의 그 쫓김이 안쓰러워,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내내 마음이 먹먹하다.
“음악이 나에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고,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음악을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밑그림이 분명해지도록 돕는 것이 레슨, 전공실기 수업을 통해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이다.
그 역할이 때로는 버겁고, 불가능인 듯 느껴지는 많은 학생들과 많은 날들이 있다.
감사하게도 오늘은 버겁지 않았다.
나는 이 학생이 졸업연주를 '완수한 미션'이 아니라 '다른 것과 바꾸고 싶지 않은 의미와 가치'로 기억할 수 있도록, 선생의 최선을 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