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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ry J Mar 09. 2024

내 아이스크림은 누가 사줄까

두 번째 사직과 그 후

그러고 보면,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나의 일신을 맡긴 적이 없다. 꽤나 의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생각해 왔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어도 오로지 내가 번 돈으로 사 먹으며 살았다. 누군가가 내 아이스크림을 사줘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적이 없다. 사직을 연달아 두 번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10년 넘게 근무한 한국의 학교에서 8월 31로 사직을 했다. 이제 정말 부부의 삶을 살고 싶어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31일까지도 문서 결제를 하고 9월 1일 출국, 9월 1일 미국 도착, 9월 2일부터 새 학교에 출근을 했다. 집에서 두 시간 떨어진 거리에 있는 학교라, 나는 이 나라에 오면서부터 남편과 또 떨어져 주말부부로 살기로 결정을 하면서 왔다. 몸과 마음을 돌볼 틈이 없을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언제는 뭐 그리 살뜰히 몸과 마음을 돌보았던가, 바뀐 환경 속에서 더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것이 차라리 적응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몸의 회로들이 그렇게 심하게 반발의사를 표할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남편과 태평양 건너 떨어져 살며 방학 때만 보던 지난 14년이 무색하게도, 두 시간 거리 떨어져 살며 주말에만 보는 것이 훨씬 더 힘들게 느껴졌다. 몸무게는 10살 이후 최저인 것 같은데 회복의 기미가 없고, 어느 날인가는 한 10분간 귀가 안 들리기도 했다. 내 심장소리에 잠을 깨는 날도 있었다.

윗집 소음에 언제라도 무너질 듯 한 아파트로 혼자 돌아가며 유난히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던 어느 날, 여보, 나 좀 도와줘 도저히 안 되겠어 도움을 청했다. 구체적으로 내가 바랐던 도움은 이 결정이 맞는가에 대한 지지였다. 이 귀한 기회를 이렇게 버리는 게 맞는가. 그 확신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정말 치열한 고민 끝에 이 결정이 맞다는 믿음을 가지고 학과장을 만났다. 할 수 있는 가장 원만하고 정리된 말로 사직의사를 전했다.


그들은 우선 내가 이미 개인으로서의 결정을 마쳤고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걸 재 삼차 확인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누구도 얼굴 붉히지 않고 최대한 내 의사를 존중했다.

“네 결정에는 이유가 있고 그걸 존중한다, 너 자신을 우선에 놓는 너를 이해한다. 학과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네가 회복하고 나면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

내가 맡은 티칭과 연주의 로드가 엄청났기에 내 몸이  이렇게 빠져나가면 그 뒷감당을 누가 하나, 나는 이런 생각으로 몸이 망가져가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차일피일 결정을 미뤄왔었다. 입장을 바꿔보면 이건 돌발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욕 먹을 각오부터 단단히 했다. 그런데 낯설게도 모두가 그저 일어난 사태에 대해 자기 위치에서 해결점을 찾을 뿐, 누구도 사태 자체에 대한 난처함에 오래 집착하지 않는다.

미국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는 걸 잘 안다.

그저 다시 확인한 것은, 세상은 내 좁은 예상 범위 따위 언제든 무력화시키며 다방면 다차원으로 돌고, 나는 어느 시점에 세상의 어느 면을 마주할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세상이 다가 아닌 것이, 다행일 때도 불행일 때도 있다. 


"한학기지만 당신들의 일부였던 것이 의미 있었다" 이 말을 거짓 없이 담담하게 전하고 나올 수 있었다. 진심이었다. 이 학교의 교육환경은 내가 한국대학에서 그리도 바랐던 환경과 흡사했다. 학과의 목적이 분명하고, 교수들은 학생 개개인에게 열정을 쏟고, 기술교육과 가치교육을 병행한다. 누구도 수업을 줄이면서 평가를 잘 받기 위한 비교육적인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나의 몸과 마음이 양쪽으로 부실해 당장 직을 수행할 수 없어 내려놓지만, 바라왔던 이상적인 교육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는 것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나는 그렇게 여기서의 교수직을 신속하게 걷어차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해에 한 번은 한국어로, 한 번은 영어로 사직서를 두 번 쓴 격이 되었다.

우리 집이 들르는 집, 돌아오는 집이 아닌 사는 집이 된 것. 이것이 내가 그 두 개의 사직서와 기꺼이, 그리고 필사적으로 맞바꾼 것이다.


나는 그 두 개의 사직서에 후회가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문제, 이제 full time job을 내려놓음에, 나의 아이스크림은 남편이 사줘야 한다.

혼자 있을 때는 잘 먹지도 않았던 아이스크림을 꼭 이 사람과 같이 있으면 끝도 없이 먹게 된다.

처음에는 내 아이스크림을 남편이 사주는 것이 정말 어색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갈 수록 생각보다 그리 불편하지는 않다.


그렇게 요양 비슷한 휴식기 동안 내내 아이스크림을 얻어먹고 난 후, 나는 천천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내가 가장 오래 해왔던 대학교육분야에서는 파트타임 강사로, 그리도 원했던 실내악 시리즈 프로그램 디렉터로, 정말 따뜻한 관객층이 있는 이 지역에서 꽤 부름을 받는 피아니스트로, 그리고 생전 처음 해보지만 매일이 놀라운 초중고 학생들의 피아노 교육자로.


금박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먹을 수 있지만 먹을 마음이 나지 않던 시절 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으면 남편이 사줘야 하는 시절을 지나,

아이스크림 정도라면 내가 다시 사먹을 수 있음이 뿌듯한 시절을 보내는 중이다.


써놓고 보니, 세 가지 다 못 견디게 나쁘지는 않다.

앞으로 내 아이스크림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그냥 지켜보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되어지는 것만 해도, 그러고 보니 나는 조금 현명해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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