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소크라테스 > 돼지 > 파시스트]라는 명료한 등식이 성립한다.
부패한 인간을 돼지로 표현함은 오래된 풍자다. 조지 오웰은 타락해 버린 돼지를 두 발로 세우면서 살찐 인간과 동격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거기서 나아가 때 묻지 않은 인간을 돼지로 만들었다.
나는 애니메이션들 중 <붉은 돼지>를 가장 좋아한다. 성질이 급하고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탓에 긴 시리즈물이나 웅장한 대서사시와는 영 맞지 않더라. 그보다는 차라리 간단하고 선 굵은 작품이 낫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우리의 주인공 포르코 로쏘는 한때 유능한 공군 파일럿이었지만 조국이 무솔리니의 지배를 받게 되자 회의감을 느끼고 돼지가 되어버린다. 그 후 사랑과 신념을 위해 비행하는 것이 내용이다. 참 간단하다. 그렇다고 단순히 이런 이유에서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포르코 로쏘는 하야오의 신념을 반영하듯 반전주의자이며 아나키스트이다. 그는 정부가 자신을 쫓아다니는 상황(포르코의 유능함과 현 상황의 위험함을 동시에 상징한다.)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나는 곤조 있는 사람이 좋다. 혹은 기백, 배짱, 소신, 하다못해 시쳇말로 '빠꾸없다'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나에게 결여된 가치를 창작물 속에서 찾아내려는 씁쓸한 마음일까? 아무튼 간에, 이와 동시에 참 능력 있다. 작중 최고의 파일럿으로 묘사되니까. 그러면서 성격도 나름 여유롭고 초연하다. 동시에 '마르코 파고트'라는 인간 시절의 순수한 인격까지 내면에 간직한다. 창작물 속의 인물을 롤모델로 정하는 것이 얼마나 볼성 사나운지는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저렇게 살고 싶다. 도덕이 소멸한 황폐화된 세계에서 홀로 선각자가 되어버린 돼지의 존재는 하나의 아이러니다. 그렇다고 외면까지 닮아서는 안되겠지만...
작 중 이런 대사가 나온다. "파시스트보단 돼지가 나아." 포르코의 캐릭터성을 한 번에 압축하는 대사라고도 볼 수 있겠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여러 가지 답변이 나오겠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통적인 가치는 존재한다. 가령 윤리와 자유, 혹은 지성 등이 없으면 그 존재는 인간이라고 보기 힘들다. 아마 이런 맥락에서 서두에서 말한 풍자들과 나아가 이 작품이 만들어 진 듯하다. 윤리도 자유도 져버린 파시즘은 인간다운 사상이라 보기 힘들다. 얼핏 보면 냉소적인 포르코가 허무주의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상은 파시즘이 오히려 더 허무주의적이다. 과학혁명에서 이어진 종교의 붕괴가 곧 도덕의 붕괴로 이어짐으로써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치는 오직 힘뿐이라는 생각이 세계대전을 이끌었다. 헤겔의 이성과 합리에 기반한 변증법적 역사관을 오독하여 왜곡된 세계정신을 추구한 '두체'를 보라. 니체의 주인과 노예의 도덕을 오독하여 왜곡된 초인을 추구한 '퓌러'를 보라.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한 것이어서 도덕과 감정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니힐리즘에 빠지는 것보단 차라리 형이상학적 가치를 믿는 게 낫다. 우리는 언제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현실을 판단하는 일은 항상 어렵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소크라테스가 될 자신이 없다. 시인 윤동주는 <아우의 인상화>라는 시에서, 자라서 인간이 되겠노라는 어린 동생의 순수한 말에 서글픈 감정을 느낀다. 그렇다. 소크라테스는커녕 인간이 되는 것조차 참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파시스트가 되어서도 안된다. 모든 것을 잃더라도 지켜야만 하는 가치가 있는 법이다. 차라리 돼지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