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기

요절

그리운 사람들과 그리워질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영원을 믿겠다.

by 박제원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기형도, <노인들>


나는 젊어 죽은 인물들을 동경한다. 가령 윤동주와 기형도 같은 요절시인들이나 김광석과 유재하 같은 요절가수들. 아니면 해외로 눈을 돌려 카뮈나 카프카, 쳇베이커 같은 인물들도 좋다. 꼭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전태일의 평전은 두 번씩 읽어봤을 정도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요절 그 자체를 동경하는 것은 아니다. 여느 사람이나 다 그렇듯 나 역시 오래만 살고 싶다. 하지만 저 인물들이 여태껏 인구人口에 회자되며 사랑받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죽음뿐만이 아니다. 인류가 멸망한 이후를 다루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는 영화와 게임, 소설을 막론하고 언제나 사랑받는 장르이며 사람이 떠나간 도시와 무너진 폐허는 관광명소로서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하다못해 옛 고려의 문인 이색 역시 부벽루에 올라 동명왕의 영화를 그리며 회한에 잠기지 않았던가?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들으면서 나는 궁금해진다. 왜 우리는 멸망을 열망하는가?


요절은 통일성과 아이러니의 표상이다. 통일성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한결같음'이다. 산 자는 죽어간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어가는 위인을 바라볼 용기가 우리에겐 없다. 추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추해지는 것보다도 더 나쁜 것은 모두에게 잊혀져 쓸쓸히 퇴장하는 것이다. 요절한 록스타의 대명사인 커트 코베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 빠르게 타오르는 편이 더 낫다고. 비참한 삶을 영위하느니 차라리 생의 불꽃을 격렬히 연소시켜 영원한 청춘으로 기억되는 것이 남은 사람들에게는 축복일 테다.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가 아니라 워털루에서 죽었어야 했다. 삶의 밀도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라 굵고 긴 삶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숱한 영웅들은 군더더기 없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의 추억 속에 신비롭게 자리잡는다.


때로는 죽음의 형태 역시 통일성에 기여한다. 장렬한 희생이나 고결한 순교는 (받아들이는 대중에게) 최고의 죽음이다. 혹은 서두에 언급한 기형도처럼 비극적이고 미학적인 죽음 역시 우리를 열광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왕 죽도록 정해진 운명, 꽃처럼 아름답게 죽는 게 낫지 않느냐는 기괴한 논리가 동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아이러니란 곧 생과 사의 대비로 나타나는 인물의 또 다른 개성이다.(죽음이 곧 개성이라는 표현이 도덕적으로 옳은 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로 죽는 것만큼 무의미한 죽음이 없다고 말한 카뮈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강렬한 록음악과 신랄한 언변으로 마왕이라 불리던 신해철은 의료사고로 죽었다. <서른 즈음에>를 부른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 떠났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얼마나 허무한가? 죽음의 질에 높고 낮음이 어디있겠냐마는 저 위대한 인물들이 얼마나 '어이없이' 죽어갔는가?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유죄판결을 받고 태어났다고 그 똑똑하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말하더라. 우리는 살면서 아무리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뜨겁게 살아가더라도 결국 필연적으로 운명에 맞닥뜨린다. 거인의 무력함은 언제나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이렇게 남아있는데 그들은 가버렸다. 그러나 아주 가버렸는가? 좋은 시대를 만들어 온 인간의 역사는 그들을 좀처럼 쉽게 보내주질 않는다. 오래된 책을 읽으면 떠나간 사람들의 관념이 마음에 어린다. 오래된 음악을 들으면 떠나간 사람들의 영혼이 마음에 울린다. 오래된 영화를 보면 떠나간 사람들의 순간이 마음에 비친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그리운 사람들과 그리워질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영원을 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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