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기

연주가 끝난 후

HIAMO 31st Autumn Concert "Zenith"

by 박제원

우리 아버지께서는 옛날부터 말씀해 오셨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운동과 독서, 그리고 음악은 꼭 같이 동반해야만 하는 친구로 삼아야 한다고. 자라면서 문제집은 넉넉히 못 가져봤을지언정 방의 한 켠을 가득 채우던 고전소설들의 책등을 나는 기억한다. 공부학원은 살면서 한 번도 못 다녀봤을지언정 그럼에도 잠깐이나마 다녔던 피아노 학원의 연습실을 나는 기억한다. 아버지의 신념으로 나는 자랐다.


내 음악 인생을 짧게 간추려볼까.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유포늄이라는 악기로 내 본격적인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작은 튜바처럼 생긴 악기로, 우리 관악부에서 가장 큰 악기였다. 아무래도 내가 당시 덩치가 큰 편이었던지라 이 악기를 시키신 듯하다. 나는 상대적으로 성실한 편에 속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출석률이 안 좋았던 다른 친구들에 비해 거의 개근하다시피 관악부에 출석했으니까. 이런 내 열정과 ‘짬‘에 힘입어 6학년이 되자 트롬본이라는 악기로 바꾸게 되었다. 트롬본은(트'럼'본이 아니다!!) 길쭉하게 생긴 나팔인데, 아무래도 범용성도 유포늄보다 낫고(유포늄은 윈드 오케스트라, 특히 군악대 정도가 아니면 좀처럼 쓰이질 않는다.) 생긴 것도 좀 더 멋들어지게 생겼다. 내 취향이지만. 그리고 특히 퍼레이드나 행진을 할 때 맨 앞에서 선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운지법을 새로 익혀야 된다던가, 악보 보는 법을 새로 익혀야 된다던가 하는 어려움이 있긴 했다. 특히나 유포늄은 Bb조 악기지만 트롬본은 C조 악기라서 다소 적응이 어려웠다.(아직까지도 나는 악보를 한 음 높게 보는 습관이 있다.) 어찌 되었든, 나는 곧잘 적응에 성공하여 하나밖에 없는 은색 트롬본을 잡았다. 그렇게 중학교에서까지 활동을 이어갔고, 3학년 즈음에는 악장이라는 직함까지 받았다. 딱히 의미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고등학교 때는 학업을 핑계로 악기를 잠시 쉬었다. 그러다가 대학교를 입학하며 오케스트라 동아리에 입단하게 된다. Hongik Amateur Orchestra, 줄여서 HIAMO라는 이름의 동아리다. 그리하여 1학년 때 귀염?둥이 막내로서 연주회에 참여도 하고 대학 인간관계의 9할을 구축하기도 하며 띵가띵가 놀다가 군에 끌려갔다. 그 시절 역시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군에서 전역하며 나는 연어처럼 히아모로 복귀했다. 심지어 내 어떤 모습을 믿어주셨는지는 모르지만 동아리의 회계관리를 맡겨주셨다. 항상 수동적으로만 살아온 터라 이런 감투가 익숙하진 않았지만 아무튼 그 덕택에 나는 군필복학생 치고 무난하게 다시금 사회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언제나 모두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우리 동아리는 학기 중에는 잔잔하게 소규모의 활동만 이어나가다가 방학 중에 대규모 연주회를 준비한다. 연주한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중 왈츠와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과 헝가리 무곡 6번이었다. 금관악기 특성상 악기를 오랫동안 쉬면 실력이 좀처럼 돌아오질 않으므로 나는 2nd 파트를 맡았다. 1st 파트는 연주회를 항상 도와주시는 대선배님께서 맡아주셨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한정한 금관악기의 또 다른 특성으로는 유입이 적다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여러 선배님들과 함께 연주회를 준비했다. 늘 감사한 분들이다.


어릴 때 잠깐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유년기에 잠깐 악기를 잡았다지만, 나는 기본기가 너무 부족했다. 악보 보는 속도도 느리고(심지어 교향곡은 가온음자리표를 쓰더라…) 박자감각도 부족했다. 연주회 막판에는 음감까지 박살 났다. 게다가 퍼스트 연주하시는 형님께서는 졸업생이셔서 7할의 연습에서 나 홀로 트롬본을 연주해야 했다. 참 어려웠다. 솔로 파트를 틀려서 합주가 멈추고 모두가 나를 쳐다볼 때는 그야말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는다고, 동아리 내부에서 내 이미지가 유쾌하게 굳어지며 이런 실수들은 어물쩍 넘어갔다. 일부러 광대를 자처한 건 아니고 그냥 뇌에 힘을 주지 않고 생활했을 뿐이다. 사실 그동안 늘 그렇게 살아오긴 했다. 어쨌든, 다행히 내 유머코드가 대부분의 동아리원들의 취향에 맞았는지 다들 내 헛소리를 좋아해 주더라. 누군가는 내 재능이 부럽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보다도 더 내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요소는 역시 주변인의 도움이었다. 동아리 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금관 수석 형이 나를 음악 안팎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에 여러 모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 사람과 나는 방학 동안 최고의 콤비였다고 자처하고 싶다. 지휘자 선생님께서도 나를 닦달하지 않고 언제나 미소 지으시면서 기다려주셨기 때문에 연주회를 잘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 존경받는 지휘자님 밑에서 연주하는 無名의 트롬본 플레이어였음에 나는 행복했다.


이 동아리에 딴에는 최대한의 열정을 쏟았다 보니 자연스레 대학생활의 기억도 오케스트라 활동밖에 남질 않았다. 후횐 없다. 이곳에서 좋은 일들만 있었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만났다. 소중한 추억들이다. 연습실의 향기는 그 어느 때나 내 곁에 은은히 남아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 순간들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느낄 때마다 애틋하고 우울해지곤 한다. 센티멘탈리즘은 늘 나를 괴롭게 했다. 매 학교를 졸업하고 삶의 분기점을 넘을 때마다 나는 괴로웠다. 이별은 언제나 아련하고 각별한 것이다. 이러한 감정으로 나는 결국 어른이 되었다. 삶에서의 이별로 나는 자랐다.


Pyotr Ilyich Tchaikovsky: Swan Lake (suite), Op.20a - No.2 Valse

Johannes Brahms: Tragic Overture, Op.81

Pyotr Ilych Tchaikovsky: Symphony No.5, Op.64

Johannes Brahms: 21 Hungarian Dances, WoO.1 - No.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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