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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익 Nov 02. 2017

비오는 정동길

여름과 이별하고, 가을과 조우하여, 겨울을 맞이하는 비

  청록이 언제 울긋불긋 다홍의 옷을 입었는지 모르겠다. 출퇴근길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지 매일매일 놀란다. 매미소리가 언제 멎었는지 모르겠다. 몸에 걸친 내 옷이 어느새 두툼한 외투로 바뀌어 있었다. 넘겨도 넘겨도 남아있던 달력이 이제 고작 두장밖에 남지 않았다.


신경을 써서 빼곡히 해야할 일을 적어둔 내 노트에는 긴급한 일정과 처리해야 할 나와 별 상관 없는 일들이 한 가득이다. 그나마 내가 삶의 향기를 누리를 것이 어떤것이 있을까 생각해 봤다.

가끔 아껴둔 돈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소주잔을 부딪히는것. 주말아침 라디오를 틀어놓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며 계란후라이를 서너개 해 먹는것. 오고가는 지하철에서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쪽잠을 자는것. 오랜만에 일찍 하루를 마무리 하는 날이면 샤워를 하고 촉촉한 로션을 바르는것. 자기전에 희미한 독서등을 친구삼아 내 허영심을 채우는것. 이정도면 소소한 것인가? 꽤 향기로울 법도 하구나 싶다.


자꾸만 허기가 지다. 머릿속에 , 가슴에 거지가 들어 앉았는지 허기가 질 뿐이다.

뭔가를 해야 한고,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기생충처럼 자리잡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상황을 조금더 개선시켜 보려고 하는 발버둥이 그 기생충에겐 자양분이 되는 것일까.


벌써 십년이 훌쩍 지났다. 십년하도고 삼년이 지났다. 서울의 정동길을 처음 걸었던 그때가 생각난다. 이문세 노래에 나오는 광화문이 여기구나, 김연우 노래에 나오는 삼청동이 여기구나, 오월의 종로에서가 이곳을 말하는 구나. 칵테일 사랑을 부른 마로니에가 바로 이 공원 명칭과 같구나. 저 넘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틀어준 노래를 가슴깊이 간직하던 18살 소년의 마음이 벌써 이렇게 훌쩍 지나가 버렸다.


명륜동을 가로질러 창경궁 돌담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종로를 향해 가다 전구 상가들이 밀집한 낯선동네를 지나 종로 4가, 종로3가, 종로2가, 종각 그리고 광화문까지 수많은 인파속을 헤집으며 호기심과 설렘으로 걸었다. 상인들의 고함소리, 열대야에 못견딘 매미소리, 부스럭거리는 낙옆밟는 소리, 온 길가에 퍼지는 캐럴소리까지 그렇게 몇해가 지났다. 십년도 훌쩍 더 지났다.


광화문 광장의 버스정류장을 찾던 갓 스물의 어리숙함도, 얇은 주머니가 염려스러워 쉽사리 배고픔을 해결하려 가게문을 들어가지 못했던 서성거림도 쏜살같이 지나갔다.

호기로움 가득했던 한 무리의 새내기들의 시끌벅적함도, 수천번이나 내렸음직한 빗물에 닳고 닳아서 희미해셔 버렸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우산들이 무거워 보이기도 한다. 나만이 느끼는 괜한 기우인지, 모두가 느끼는 공통된 감정인지 난 알길이 없다. 어느새 난 그토록 설레하던 정동길이 더이상 새롭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런가보다.' , '그랬었구나', '그러하겠지'


이것이 어른이 된 담담함 인지, 무신경해진 건조함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겨울을 맞이하려는 갑작스런 가을비에 나도 꽤나 당황스러웠나 보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 지나가며, 앞으로 또다른 세월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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