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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자의 썰 May 27. 2020

Out of Africa

American Express Card / Luftansa

아프리카 C국에서 돌아왔던? 탈출했던?  이야기는 무슨 첩보 영화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좀 아찔하기만 하다.  


2007년 7월이었다. 열기왕성했던 30대 후반, 교회에선 선교부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아프리카 C 국으로 먼 길을 가는데 동행하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떠났다.  ‘단기선교’라는 깃발을 높이 든 십자군 군병처럼.  가방 두개를 가지고 갔는데, 한 가방엔 치과도구 가득 채우고 대서양 넘고 지중해 넘고 사우디아라비아 거쳐서 갔다.  아주 깜깜한 밤에 도착해 활주로가 끝나는 곳에서 트랩을 걸어 내려오는데, 이 나라 수도이지만 제대로 된 공항 건물 한 채 보이지 않는다.  큰 천막 몇 개가 공항을 대신하고, 제대로 군복을 갖쳐 입지도 않은 시커먼 사내들이 촘촘히 총 들고 서 있는 좀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마음은 이 곳을 빨리 나가고 싶은데 치과가방은 나왔는데 내 옷 가방이 나오지 않는다.  이미 새벽 2시를 넘었는데.  프랭크프루트에서 비행기에 실어지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다음 비행기가 언제오냐 물어보니 삼일 뒤에 온다고 한다.  일주일에 독일 비행기 Luftansa 가 두번 들어오는 것이 전부라고 한다.  밖에서 기다리기로 되어 있는 선교사 생각에 나오지 않은 옷가방은 포기하고 천막사이를 거쳐 깜감한 밖으로 달려나갔다.  가방을 기다리는 동안 로컬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동양사람이 퍽이나 신기했는지 나를 보고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른다.  어디서 왔냐고?  United States ! 라고 짧게 말하니 다 들 인상이 변한다.  뭐지?  뒤에선 사람들이 소리 지른다, 차이나?  .. 에라 모르겠다, Yes China !  라고 대답하니 다 들 엄지 손까락 올리면서 화답한다, China Good !!   순간 뒤통수가 뜨끔했다.  아..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아직 독재자의 칼날이 서슬 퍼런 공산국가이구나..  말 조심 해야겠다는 생각에 식은 땀이났다.   


가로등 하나 없는 파킹장에 걸어 도착하니 차 안에서 하픔을 하는 한 사내가 내린다.  필라에서 한번 만난 선교사였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왔냐고?  아주 신경질 적으로 물어본다. 이건 뭐지?  더 애가 닿던 건 나 였던 것 같은데?  자초지정을 말하고 나니 씩씩거리던 그 사내는 좀 진정이 되었는지 빨리 숙소로 가자고 차를 몬다.  냉정하다.  도시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불 하나 없는 황무지 사막이았다. 도시가 가까와지니 반가운 영어 간판이 눈에 뛴다, “ XXX Intercontinental Hotel”  신기했다.  이런 곳에 이런 호텔이 있다는 것이.  선교쎈타로 사용한다는 집에 도착하니 높은 철문에 자물쇠가 몇 겹으로 채우져 있다.  그냥 집이었다.  방이 두세개 있고 바나나 나무 같은 것이 몇그루 있는 정원이 있는.  밤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잘 곳을 봐주겠다면 이방 저방을 다녔다.  뭐라고 말하기 참 힘든 풍경이었는데.. 방마다 대학생 아이들이 구겨져서 자고 있는데 발 뒤딜 틈도 없다.   방마다 10명 이상씩 있는 것 같았고 땀냄새가 진동을 한다. 결국 선교사가 날 데리고 간 곳은 부엌이었다.  이미 그곳에서도 두명의 대학생이 정신 없이 자고 있었는데 나더러 여기서 자라고 그냥 퉁명하게 한마디 한다.  더 가관이었던 것은 .. 이부자리가 없었는데 옆 의자에 덮혀있던 얇은 담요한장이 있었다. . 냄새나는 양말 신은 발로.  그 발까락으로 그 담요를 잡아서 식탁 옆으로 밀어준다. 그리곤 내일 아침에 오겠노라 한마디 하고 사라져버렸다.  아니 이건 뭐지?  꿈인가?  


담요를 제대로 바닥에 깔고 앉았는데, 지금까지 몇 시간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사방은 깜깜하고 모기들이 정신 없이 욍욍거리며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별 별 생각이 다 든다.  헤어진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아내와 어린 아이둘, 노부모님.  눈물도 흘렀다.  아니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지?  너무 꿈인것 같아 몇번을 꼬집어 봐도 현실이었고, 그래도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우울해하며 새벽까지 뜬 눈으로 세웠다.  아침이 되니 하나둘 깨어서 부엌으로 모여든다.  대부분 대학생들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왔다고 한다, 단기선교로.  20명은 넘어 보인다. 조그만 집이 북젹이기 시작한다.


이 곳을 오게 된 계기는 이 선교사가 우리가 있는 필라를 방문해 이 험한 공산국가에서 비밀리에 선교를 하고 있고, 여름을 맞아 동네 아이들 영어캠프를 할려고 하는데 자원봉사할 선생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미 캘리포니아에서 대학생들이 좀 오기로 했다고.  그럼 나도 같이 가서 치과봉사를 할 수 있다고 하니 좋아라 해서 결정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미 우리 교회에서는 중국 연길로 봉사팀이 짜져 있어서 나랑 같이 갈 수 있는 지원자를 없었다.  뭐 어떠랴, 이미 캘리포니아에서 대학생들이 온다고 하니 그들과 함께 손을 맞추면 치과치료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혼자 가는 길이라 짐이 적지 않았다.  


아침에 다시 만난 선교사는 나를 본척 만척이었다.  뭐지?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나.. 이 사내 뭔가 정말 이상하다..  대학생들 사이에 껴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영어캠프를 갈 준비를 하라고 하며 다시 주의점을 상기 시키는데… 지정된 장소에외는 절대 나가지 마라, 수업시간이 끝나도 교실에 남아 있으라, 낮선 사람이 오면 절대 말을 하지마라…  나도 그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캠프를 갔다.  학교였다.  운동장이 있는 초등학교 같았다.  아주 초라한 건물을 기대했었는데 그래도 제대로 된 건물 두채가 있는 학교였고 오는 학생들은 하나 같이 단정한 초등학생들이었다.  나도 일학년의 한 반에 보조교사로 들어가라고 한다.  알파벳 가르치는 반이었다.  하루종일 교실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말 한마디 못하고, 밖에 한번 나가보지 못하고.


몇 몇 대학생과 겨우 말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사진 찍는 친구가 있었는데 들고 있는 카메라에 대해서 몇 마디 나누면서 안면을 트고, 또 치과의사가 되고 싶은 친구가 있어 몇 마디 나누니 이제 두명 아는 사람이 생겼다.  학생들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60대 아주머니가 한분 계셨다.  잠깐 말을 나누어보니 이 분도 필라에서 오신 OOO 교회 권사님이라고 한다.  그 분이 날 더 반가와 하시는 것 같았다.  나중에 이야기 좀 하자고 말을 조심하셨다.  또 한분 나보다 10살 정도 많아 보이는 사내가 한 명 있었는데 하루종일 겉돌고 있었다.  간혹 한마디씩 건내면 뭔가 불만이 쌓여 있어보였다.  선교사 옆에 항상 붙어 있는 젊은 친구가 있었는데 Conneticut 주 한인 교회에서 온 전도사라고 한다. 근데 둘 사이가 뭔가 좀 이상하다.  완전 수행비서 같은 느낌이었는데 한번은 식사하는 테이블에서 선교사가 밥알을 좀 흘렸는데 그것을 손으로 집어 먹는 모습도 봤다.  아니 이건 또 뭐지?  뭐 이런 이상한 일들이 계속 보이는 거야?


등하교때 대부분은 학부모들이 같이 왔는데 한쪽에서 지폐뭉치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눈에 뛴다.   내일은 꼭 가지고 오라고 닥달하는 모습도 보였다. 대학생 친구에게 물어보니 지금 하고 있는 영어캠프 tuition 이라고 한다.  그일은 선교사 와이프가 담당하고 있었다.  무섭게 내려 꽂으며 말을 하는 이 사람도 내가 상상하는 선교사 와이프의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겨우 다시 만난 선교사에게 말을 건냈다.  영어수업을 하지 않는 다른 교실에서 치과 치료를 병행해도 되지 않겠냐고 물어 봤다.  돌아오는 대답은…생각 좀 해보자. 좀 기다려봐라.. 라는 것이었다.   흠..   아니 이런식이었으면 날 왜 부른거지? 먹고 자는 것은 어쩔지언정, 내가 할려고 했던 일은 최소한 해주게 해야 하는거 아닌가? 그것도 나 좋아라 하는 것도 아니고 잠시 본 아이들은 치아문제가 심각하던데.


그렇게 나의 첫날 캠프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 왔지만 난 다시 부억 한 구석이 내 자리였고, 갈아입을 옷가지 하나 없었다.  샤워도 못했다. 겨우 말을 해 볼 수 있는 그 권사님은 식사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그 선교사는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그 날 저녁도 난 거의 뜬눈으로 세울 수 밖에 없었다. 덥을 담요 한장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도 같은 일정이었다.  다 조용히 캠프에 갔다가 조용히 돌아온다고 했다.  어깨가 부딯히며 빽빽하게 앉은 식탁에서 같이 안게된 권사님이 말을 건낸다.  자기도 지금 모든 것이 너무 이상한데 말은 못하고 그냥 시키는 건만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혹시 여권을 요구하면 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한다. 아니다 다를까 식사가 끝나자 그 선교사 와이프가 나에게 와서 여권을 달라고 한다.  모든 여권은 자기가 같이 보관을 한다고.  단체생활에서 그럴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순간 섬득한 기분이 들었다. 난 학생도 아니고 내가 책임질 수 있으니 내가 보관을 하겠다고 말을 했다.  얼마 있지 않아 선교사가 달려 왔다.  왜 여권을 주지 않느냐고.  난 단호하게 말을 했고 계속 고개를 좌우로 젖는 그 모습을 잊지를 못한다.


다시 영어캠프가 이루어지는 학교로 향했고, 선교사 와이프가 학원비로 실랑이 벌이는 모습도 보고, 하루종일 교실 뒤에 앉아만 있어야 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다 같이 다시 숙소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했다.  이미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냄새나는 옷에 다크서클은 얼굴을 덥고 있었다.  선교사는 나를 위해 옷가지를 가지고 왔는데 대학생들이 들고온 구제물품에서 추려 왔다 한다.  빨지도 않아 냄새나는 옷들이었다.  안그래도 얼굴보기 힘든 선교사가 직접 나를 찾아 왔기에 말을 건냈다. . “ 저 빨리 돌아가야겠습니다. “


좀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난 그 때 삼국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이미 몇번이나 읽었지만 다시 정독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온갖 술책과 임기웅변적인 책략이 얼마나 많이 나오지 않는가?  나도 모르게 그 소설속에 한 주인공이 되고 있었다..  나 지금 몸이 너무 좋지 않다.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이 있는데 공항에서 분실한 가방속에 들어있어 이틀째 먹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틀동안 잠을 못자고 있다. 몸에 이상이 오고 있다. 너무나 진진하게 이야기하는지라 이 선교사 양반도 어쩌지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점심을 먹고난 후 선교사 와이프가 날 부른다.  자기가 아는 의사가 있는데 이 의사한테 그 필요한 약을 구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며 전화를 바꿔준다.  선교사부부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그 아프리카 현지 의사랑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아는 제일 발음하기 어려운 약이름 두개를 이야기하며 이 약을 구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결과는 뻔했다, 그 의사는 무슨 약인지도 모르고 쩔쩔매고 있었고 난 연극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휴식이 필요한데 이 집에서는 어려우니까 공항에서 들어오면서 본 Intercontinental Hotel 로 데려다 달라고 다구쳤다. 오후에 다시 영어캠프가 있는지라 얼뜰결에 선교사 부부는 자기네 차에 나를 태우고 그 호텔까지 가게 된다. 워낙 작은 도시가 15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호텔앞에 도착하고 그냥 가시라고 나는 내렸다.  수속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그러자 그 선교사 부부는 정말 한마디 말도 없이 금방 사라져버렸다.  와.. 삼국지의 승리 ,,,  난 난생 처음 그렇게 뻔뻔한 거짓말을 해 보았다.  


호텔 앞에는 여러나라 국기가 걸려 있었는데 섬듯한 기분이 다시 든다.  거기엔 북한 인공기, 중국, 러시아 국가가 이 나라 국기 옆에 나랑히 걸려 있다.  와.. 쎄한 느낌.  체크인을 하러 들어간 호텔안에 보이는 백인들은 다 들 러시아 사람들 갔았고, 군복입은 동양인들이 보였는데 북한군들 이었다.  더 불안했던 것은..  이 곳을 올 때 다른 크레딧카드는 다 집에 두고 American Express Black Card 하나만 들고 왔고 현금은 US Dollar 조금 밖에 없었다.  이 호텔에서 이 카드를 받지 않으면 어떻하지?  다행히 프론트엔 American Express Card 싸인이 보였고, 방을 하나 구할 수 있었다.  방으로 올라와 처음으로 샤워를 하고 속옷을 빨았다.  침대에 몸을 누이니 불안한 생각이 끝도 없이 든다.  이제 어떻해야 하지?  잠깐 잠이 들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어떨결에 문을 여니 그 선교사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와 있고 같이 온 그 전도사와 대학생 몇명이 나를 끌고 나간다… 꿈이 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악몽을 꾼 것 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조그마한 길 건너편에 천막으로 막사를 친 큰 공터가 있었는데 천막 위엔 까만 글씨로 UN 이라는 싸인이 보이고 같은 싸인을 한 차량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있었다.  그래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저쪽으로 튄다…  여권을 속옷 안에 보관하고, 호텔방문을 나가 비상구가 어디에 있는지도 확인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호텔방에서 미국 집에 있는 와이프에게 콜렉트 콜을 했다.  상황을 이야기하니 더 당황하는 것은 와이프였고 어떻게든 빨리 돌아가겠노라 이야기를 했다.  이 곳 공항으로 전화를 해보니 영어를 하는 직원을 찾기 힘들었고, 어떻게 한명이랑 연결이 되었는데, 내 예상대로 내일밤 한시에 Luftansa 비행기가 들어온다고 했다. 그 비행기는 금방 다시 Saui Arabia 거쳐 Frankfurt로 돌아간다고 한다.  비행기표는 전화로 예매가 불가능하고 공항에서 구입이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는 불안한 말을 했다.  이 곳은 인터넷도 되지 않았다.

호텔방에 전화가 울렸다, 그 선교사였다. 안부를 묻는다. 난 내일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 선교사는 저녁에 데리러 올테니까 같이 저녁 식사를 하쟈고 한다. 저녁에 되어 불안했지만 따라나섰고 숙소에 도착해 그 권사님, 켈리포니아에서 온 사내, 수행비서 같은 그 전도사를 태우고 자기 집에 가서 식사를 하쟈고 한다.  사택은 근사했다.  미국에서 볼 수 있는 근사한 싱글하우스였고 한국식으로 차린 저녁상이었다.  선교사가 하는 온갖 기도는 끝이 나지 않았고 본인이 하고 있는 ‘선교사역’을 듣고 있느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나는 내일 돌아간다고 재차 이야기 했다.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별 반응도 없었다.  내가 치과사역을 하지 못해 미안하고 개인의 불찰로 ‘사역’도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역시 별 반응이 없다.  그래.. 끝까지 아무 반응도 하지 말고 아무 짓도 하지마라.. 라고 내 마음속에선 불안해 하고 있었다.  나를 다시 호텔로 데려다 주었다. 그리곤 별 말도 없이 가버렸다.  


다음 날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호텔을 나섰다.  일지감치 공항에 가 티멧을 사야했다. 다행히 호텔에 공항 셔틀 버스가 있어서 혼자 그 버스를 타고 공항을 갔었는데.. 아뿔싸.. 공항이 아예 문을 열지도 않았다.  총 든 군인들만 철조망 쳐진 공항밖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공항을 간다고 했을때 버스 운전사가 뭐라뭐라 그랬는데 그게 그말 이었던 것 같다, 공항 문도 열지 않았는데 왜 가느냐..  호텔에 다시 돌아와 로비 한 구석에 쭈그리고 있었는데 그때도 군복입은 북한군을 여럿 보았다.  드디어 해가 져물고 10시경 공항가는 버스는 탔는데 그땐 공항을 가는 러시아 사람들이 여럿 버스안에 있었다.  나는 비행기 티켓도 없이 그렇게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칠흙같은 어둠속에 공항만 밝히 불이 켜져 있었고, 총을 든 사내들의 얼굴은 더 검어 보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티켓 카운터에 가니 다행히 당일 티켓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Americal Express Card 를 내미니 당황하는 직원.. 이 카드는 안된다고 한다.  오 .. 노….  제발 제발 다시 물어봐도 이 카드는 안된다고 한다.  죽으라는 법은 없나..?  옆에 있던 직원이 다가왔다.  안면이 있는 얼굴이다.  내가 삼일전에 이곳에 왔을때 가방이 나오지 않아 어떻게 된건지 물어보았던 그 여직원이었다.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저기 내 가방이 있다고 한다.  정말 티켓카운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쪽 구석에 내 가방이 있었다. ( 티켓 수속하는 곳과 짐이 나오는 벨트가 한 천막안에 다 있었다.)  반가왔지만 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 구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순간 어떻게 다시 호텔에 돌아가서 원래 돌아가기로 한 날짜까지 일주일을 더 호텔에 숨어 있어야 하는 걱정을 했다.  그 여직원에게 다시 설명을 하고 American Express Card 를 사용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이 직원이 한참을 여러군데 전화를 하더니 이 천막 옆에 공항 메인 빌딩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아마 결제가 될 수도 있을꺼라고 한다.  그리곤 내 여권과 카드를 가지고 사라졌다  한 이십분 걸렸다.  저쪽에서 총총걸음으로 달려오는 그 여직원이 보인다.  


치아가 다보이는 환한 미소와 함께 여권과 영수증, 보딩패스를 건내준다.  할렐루야… 잊어먹었던 그 가방까지 가져다 준다.  천사다….. !   이름을 물어보니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다그쳐 물러보니 Rechael? Rebecca? 안타깝지만 잊어버렸다.  그런데 미 미소와 얼굴은 기억하고 있다.   탑승객이 나포함 3명쭌이었다   루프탄자 승무원들은 공항에는 아예 없고 보당을 하니 얼굴을 보인다   천막을 나와 비행기를 보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신 없지만 그때 찍은 사진이 한장 있다  Frankfurt 공항에 도착해 필라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바로 없어 공항호텔에서 하루를 묶었는데 다행이 옷가방이 있어 나흘만에 처음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이렇게 일열의 사건들은 끝이 아니라 에필로그도 있었다..  필라로 돌아오니 이번에 내 치과가방이 오지 않았다.  아깝지만 겪었던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위안했는데 2주 후 Luftansa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혹시 가방 하나 분실했냐고.  간단한 확인절차후 바로 다음날 집으로 배송이 되었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tag을 보니 홍콩까지 다녀 온 것 같았다.  


필라로 돌아와  한달뒤 그 곳에서 만난 권사님과 다시 만났었다.  그때 말도 없이 사라져서 너무 죄송했다고 사과하니 잘 가셨다는 말로 화답하셨다.  본인도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었다고.  자기도 처음부터 모든 것이 이상하고 불안했는데 그냥 시키는 것만 하고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계셨다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의 연속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분도 나도 소속된 교회에서 들은 말은 이 격은 이야기를 함부러 이야기하지 말고 조심하라는…?   좀 화가 나는 이야기였다.  무엇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하면 안되고, 무엇 때문에 우리의 풀리지 않는 의문은 답을 찾을 수가 없고, 무엇 때문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는거지?  많은 것들이 어이가 없었다.  큰 일은 없었지만 자칫 잘못하면 뭔가 크게 잘못될 위험이 많이 도사리고 있었다.  생각하면 여전히 화가 사그라즐지 않는다. 거의 20년 전의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이 싫다.


나중에 듣게 된 소식이 있었는데 그 선교사는 그 나라에서 쫒겨나 다시 다른 어떤 아프리카에 있다는..   과연 선교사가 선교사 일을 하고 있었던 걸까?  


이렇게라도 나의 Out of Africa 이야기는 끝을 내고 싶었다.  결국 남은 두가지는 첫째 더 이상 American Express Card 를 사용하지 않는다. 조마조마 했던 기억을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  둘째는 Luftansa 비행기가 나의 favorite 비행기가 되었다. 왼만하면 그 비행기를 선택한다. 아직도 그 돌아오는 비행기 보딩패스 조각은 내 지갑안에 소중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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