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종 종Mu Mar 08. 2023

누에고치의 구멍

자갈과 냇물

#.

저녁에 해야지.

낮에는 마음이 성가셔 미뤄두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니 몸이 아무런 힘이 없고 그저 눕고 싶다.

이렇게 골수까지 백수이고 싶은 3월 초순.

건강 탓인가.

아니면 휴식이 요긴한 막간이라선가.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

남은 양심, 즉 일종의 습관의 꼬투리 같은 것을 끌어모아 잠깐이나마 책상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낮에 도착한 책. 귀가 얇은  탓에 꼬임에 넘어갔다 치고 상당한 책값을 치르고 주문한   <장자>.

책장을 열고 내가 좋아하는 붕새 대목이라도 훑어보기로 한다.  한 번 날아 만 리 남해로 간 붕새의 하늘과 바다.


나는 과연 단 한 번이라도 무변무제의 꿈을 꿔 본 적 있던가.


#.

오늘 받은 신문에 시 한 편.

이설주 시인의 <봄비>.


...

겨우내 그리워도 밤이 남은

실꾸리처럼 풀어내듯 긴긴

다 못한 이야기들.

...


: 지쳐 풀어진 몸으로 금세 잠이 들 것 같은 지금인데, 마음 한 구석엔 풀어도 풀어도 다함이 없는 실타래처럼 긴 이야기가 누군가의 귀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다.


눈은 아직 펼친 신문에 머물러  있다.


아랫단에 봄비를 은유한 "실꾸리"란 시어가 나오리란 걸  알 리 없는  윗단의 칼럼이스트는 누에고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었다. 누에고치의 바늘구멍만 한 틈을 비집고 나비가 나오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그러나 인위적으로 구멍을 키워주면 나비 날개는 잘  날지 못한다고. 시련이 날개 힘을 키워주는 모양이라고.그러면서 서양 속담 하나를 덧붙였다.


"흐르는 냇물에서 돌을 치워 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는다."


#.

사실은 반은 느끼고 반은 어리둥절한 채 감내한 지난 3 년은 나름으로 시련기였다.

엊그제 결국 내 맘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당당한 뒷모습을 남기며 그 시련기를 매듭지을 수 있었다. 우물쩍거리지 않았으니 손뼉 칠 일이건만,

내가 애정하는 많은 순간, 그 순간마다 나 혼자였을 리 없으니 사람과의 이별은  가슴 아픈 일이다. 가슴과 이성은 이렇게 평행인 채로  하루가 가고 있다.

푸른 멍을 끌어 앉고 하냥 해바라기를 했던  봄날 이었다고나 할까.

그곳은 있을 곳이 못 되었다.


나는 안다.

바늘구멍만 한 그 틈을 벌리고 나온 이상 애벌레의 어둠을 다시 묘사하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이라는 걸.


그렇다고 잊지 않은 채 매몰시킬 것인가.

현실은 그러라 하지만 성장하는 영혼은 아픔을 외면하지 말란다. 그건 너무 단조롭다고.  

시냇물의 노래는 그래서 우리를 일깨우고  성장시킨다.


모든 기억은 문학의 힘을 빌려 진실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무겁고 아프던  돌덩이는 삭제되기보다  어디쯤인가 내 마음이 흐르는 길목에 옮겨둘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대왕오징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