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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아래 미친놈.
사람들이 그놈 미쳤다고들 말했는데, 부른다고 들어갈 것여? 그냥 못 들은 척 지나쳐야지. 죽을 운이라 그랬겠지. 들어오라고 부르니까 들어갔대, 이 양반이 무슨 생각이었던지...
산이 보이고 마을이 끝나는 그쯤에, 남자가 걷고 있는 게 보인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니 내심 먹이를 노린 것처럼 그놈이 남자더러 들와 보라고 한다. 내 생각엔 그 말 앞에 뭔가 수작이 있었을 것 같다. 집안의 뭐가 고장났다든지, 목이 마르지 않냐든지. 사람의 인정을 일으키는 그런 앞머리로 남자를 꾀어 마당 안으로 들어오게 했으리라.
'그런데 왜 죽였대요?'
묻지 못한다. 오십 년이 넘도록 과부로 살아온 노인은 미친놈한테 왜?라고 캐는 대신 품 안에 칼을 품고 다녔다고.
슬픔도 분노도 대략 증발해서 기억만 넘치는 지금이련만, 그래서겠지만 노인의 서술은 어수선하다. 미친놈이 죗값은 치렀는지, 미친놈이라 풀려나서 버젓이 살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저 키도 작은 젊은 여인이 억울하고 분해서 칼 하나를 품고 산길을 오르내리는 것만 보인다. 성난 파도와 같다. 자다가도 벌떡벌떡 깨어났지. 복수의 살의!
몇 개의 마침표 후. 눈앞의 바다 파도는 사라지고 잔잔하기만 하다.
딱 한 번 꿈에 찾아와 물어.
"빚은 다 갚았는가?"
"다 갚았지."
나는 솥에 물을 붓느라고 부뚜막에 몸을 기울이고 있는데 외양간께에 서서 그 한 마디여.
그때는 농사지은 걸 거둬들여야 돈이 생기니까 동네 부잣집에서 돈을 꿔다 쓰곤 했어. 장부를 넘겨주는데 자꾸 나오더라고.
"많이도 갖다 썼더만."
"아, 내가 이렇게 저렇게 빌린다고 얘기 다 했지 않았나."
내가 원망하는 줄 알고 설명해 주는 것이지. 갖다 쓸 때마다 다 말해 준 것이니 의심 말라고. 알지. 송아지 한 마리 팔아서 다 갚았어. 내가 빚부터 갚고 있으니 이웃들이 애들 데리고 먹고살 궁리부터 하지... 하며 혀를 끌끌 찼지.
'무슨 부부가 이럴까.'
미친놈에게 살해당하는 그 순간마저 빚 갚는 일부터 걱정했을 남편. 생때같은 남편을 잃고 온몸이 절규하는 와중에도 빚부터 갚자고 서둘렀을 아내. 이 둘이 꿈속에 만나 갚았는가, 갚았소. 이 두어 마디를 나누고 있다.
혼자서 그 빚을 다 갚게 해 미안하오. 그리고 믿어주오. 그 빚 내가 허투루 빌려 쓴 게 아니오.ㅡ 너무도 정직하고 선량한 채로 생사별리를 하고 말았다.
난 이미 감동해 버린 채이다.
화전火田을 관두게 되어 산에서 내려오고, 낯선 경기도 화성의 진땅에서 속고 뜯기며 견디다 어찌어찌 지푸라기라도 잡고 서울로 옮겨왔다.손님에게 맛만 보라고 내어놓은 쑥떡은 그때 지푸라기가 되어준 큰딸이 엊그제 들고 온 것이다.
"담백하고 맛있네요!"
지금은 숨차고 다리 아파 쉬엄쉬엄 골목 한 바퀴에 하루가 다 갈지라도 맑은 샘물 같은 인생이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