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엔딩(Happy Ending)

중요한 것은 최후의 승리

by 새벽종 종Mu
뜨거운 여름을 이기고ㅡ맨드라미

안데르센의 <(어느) 어머니 이야기>란 동화가 있다. 이 글은, 아기를 잃은 한 어머니의 눈물겨운 모성애가 그려진 작품이다.


병든 아기를 간호하다 깜빡 조는 사이에 아기를 사신(死神,죽음의 신)에게 빼앗겼음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기를 데려간 사신을 만나기 위하여, 연이은 희생을 감수하며 길을 헤매다 심지어는 눈과 젊음마저 뺏겨버리지만, 결국은 사신이 있는 곳에 당도한다.


그런데 그곳은, 하느님의 주재에 의해 생사가 결정되는(사신은 하느님의 분부대로 심부름만 할 뿐이라고.) 수많은 생명들이 초목의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 커다란 온실이었다.

담벼락 옆으로 작은 화단이 있고 거기 풀꽃들이 예쁘다ㅡ고대 앞

그 온실 안에서 어머니는 마침내 자신의 아기가 내는 심장 소리를 찾아냈다. 그때 온실을 지키는 할머니가 말해주길, 이것이 생명의 꽃이다. 죽음의 신이 (아기의 생명인) 그 꽃을 뽑으려 하면, 그럼 너는 다른 꽃들을 다 뽑아버리겠다고 위협해라. 그것만이 네 아기를 살리는 방법이다라고.


이윽고 죽음의 신이 들어왔다.
어머니는 눈물을 흐리며 애원했다.
"제발 제 아기를 돌려주세요!"

죽음의 신은 들은 척을 아니하고, 아기의 생명이 담긴 여린 풀포기를 뽑아 천국(*죽음)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다급하게두 손에 닿는대로 다른 꽃포기를 잡아쥐고는 죽음의 신을 향해 외친다.


"당신이 그걸 가져가면, 나는 여기 있는 꽃을 모조리 뽑아 버리겠어요."라고. 배운대로 사신에게 위협을 했다.
그러자 죽음의 신은, 네가 그러면 그 꽃의 아이들이 죽을 것이고, 그 아이들의 어머니가 지금의 너처럼 불행해질 거라고 경고했다. 그리고는 오는 길에 주웠다면서 여자의 눈을 돌려주며, 여자로 하여금 우물 속을 한번 들여다보라고 한다.


우물 속에는, 세상의 복을 혼자 다 받은 듯한 행복한 생명 하나와, 슬픔과 괴로움, 무서움과 불행만 가득한 생명 하나, ㅡ이렇게 상반된 두 개의 생명 모습이 비쳤다.

사신이 말한다.

"그대가 본 것이 바로 그대의 아기의 앞날이니라!"

여자는 순간 딜레마에 빠진다.


여자는 아이를 되찾아가고 싶었고, 온실을 지키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사신을 이길 좋은 패(위협)까지 쥐고 있었지만, 그렇게 살린 자신의 아이가 이후 불행한 운명을 걸머지고, 언제까지나 암담한 인생살이를 해야한다면...아이를 위해 잘한 일일까?

그러니 알아야 했다.
" 이 둘 중 어느 것이 불행의 꽃이고, 어느 것이 행복의 꽃입니까?"
그러나 죽음의 신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두 포기 식물 중 하나가 여자의 아이라는 것이다.
"이 중 하나가 그대 아기의 꽃이란 것만 가르쳐 주겠다."
이 말을 들은 여자는 더 이상 사신과 대항할 수가 없다. 아이와 헤어지는 건 슬프지만 결단을 내린다.
"차라리 데려가세요! 우리 아이를 하느님 나라로 데려가란 말이에요! 제 눈물도, 제 소원도, 제가 한 말은 모두 잊어 주세요!"

어머니는 고개를 가슴에 파묻었다.

그러자, 죽음의 신은 어머니의 아기를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나라로 가 버렸다.


대강 이러한 줄거리인데, 목숨 같은 아기를 천국으로 떠나보내기로 결정하는 어머니. 그녀에게서, 일체를 아이의 행복에 우선하여 고뇌하고 결정하는, 그야말로 숭고하다할 어머니의 사랑을 본다. 아이가 하늘 나라로 떠나면, 그녀 자신 얼마나 슬프고 외로울 것인가.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사양치 않는 어머니,

그것을 생각할수록 너무도 가여운

그럴수록 너무도 위대한 너, 여자여.


불전(佛典) <열반경>에는 빈녀(貧女)가 항하(恆河)에서 자식을 애념(愛念)하여 신명(身命)을 바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병도 굶주림도 추위도 이겨내며 떠돌다 갠지스 강의 거센 물살에 휩쓸려간 비극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아이를 자애로 끝까지 감싸 안은 자비의 일념으로 대복덕의 경애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케다 다이사쿠 <어머니와 자식이 복광과 환희에 찬 종소리를>, 출처 <법련> 2020년 11월호, 2-3쪽)


안데르센의 동화는 <열반경>의 빈녀와 닮았다.

유럽의 반대편에 있는 동양의 두 대륙, 인도와 중국의 문화에도 관심을 가졌던 흔적은 그의 동화집 여러 작품에서 발견된다.

그래서인지 나는, 동화 속의 어머니가 아이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 가시에 찔리고 머리카락을 뺏기고 눈도 뺏기어서, 불쌍한 몰골이 되었으면서도 끝까지 아기를 포기하지 않는 부분을 읽을 때마다, 불교 경전 속의 강의 급류에 휩싸여서도 절대 아기를 놓지 않는 빈녀의 모습이 오버랩이 되곤 했다.

앞자리 할머니가 쓴 모자에 달린 그림글자,오래 사시라는 축복의 도안일까? ㅡ버스 안에서

오늘 나는 두 분의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한 어머니는 지금 사는 동네의 이웃 할머니. 음식을 소화시키지를 못해 많이 먹지를 못한다고, 어제 상추를 사와서 한 끼에 세 잎씩 먹어서 아직도 많이 남았다고 했다.

상추 세 잎?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음식절제다. 이 정도면, 환자 상태로서의 강제된 소식(少食)에 가깝지 않은가.

"이러고도 살아 견디우."

먹는 게 최고 보약이라 했는데, 하필이면 소화기관이 약하니...신체건강의 악순환을 누구보다 본인 자신이 느끼고 있으리라. 여기에 뭐라 대꾸해 드릴 말이 없다.


또 한 분 통화한 어머니는 나의 친어머니.

낮에 전화를 안 받길래, 저녁을 먹고 다시 걸었다.

"저녁은 먹었냐?"

"먹었죠. 엄마는요?"

"몰- 라. 먹었는가 안 먹었는가....?"

한 지붕 아래 살 때 우리 자식들을 위하여 한 번도 밥짓기를 건너뛴 적이 없던 당신이, 자신만의 끼니는 정작 잊고 사신다. 하루에 한 번을 먹는가, 두 번을 먹는가...


어느 시에서 "위대한 어머니 숭고한 어머니 엄연한 어머니"라고 어머니를 읊었다. 그 시를 몇 번씩 읽으면서, 그래, 어머니는 정말 위대한 존재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의 어머니들이 인간으로서 완전한 존재는 아니다. 나 자신도 한 아이의 엄마지만, 엄마로서 어수룩한 일면이 너무 많다고 매일처럼 실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완전한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란 존재가 너무도 숭고하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평생을 지속하여 자신보다도 자녀와 가족을 위해서 열정을 쏟아붓는 그 행동에 있다. 동물적 본성에 깃든 생존을 위한 이기심. 이러한 이기적 본성을 유전자로 갖고 종의 번식을 이어온 인류의 역사가 아니던가. 이 사실에 비교하면 자식을 위해 이타적일 수 있는 어머니의 자애야말로 그런 마음의 존속 자체가 인류 역사에 가장 기적적인 사건이다. 어떠한 세상에서도 어머니는 존재하여, 아이를 보듬어 길러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어머니를 예찬한 시인의 언어가 결코 상투적인 과장이 아니라는 것,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실 그대로라는 걸 인정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다.

모친 이미지와 신화세계의 모신(母神) ㅡ수유역 상가

맞다, 어머니가 얼마나 위대하고 숭고하고 엄연한지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데, 그 어머니가 씩씩한 기세를 잃어가고 있있다. 특히 80 이후부터 그렇다. 그런 어머니가 안타깝다.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활력에 넘치던 어머니,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모든 걸 퍼주던 어머니. 그랬던 어머니가 고령에 이르러 행복할 수 없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어찌하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가. 고개를 숙이고 원인을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보기엔, 어머니는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의 생명을 위한 일체의 노력 또한 필수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아무 심리적 준비가 없다. 자신을 위한 일을 늘 뒷전으로 하며 살았던 부작용인 게다.

또 추측하건대, 자녀들이 하나둘 독립하여, 어머니로서 자신의 열정을 거두는 시기를 맞게 될 때, 그때 한꺼번에 너무 마음을 놓은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성급하다 싶게, 생활과의 전쟁에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해 버린다. 그리고는 자신을 침해하는 그 무엇에도 열심히 싸우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녀의 일에 올인해야 하는 때와 올인할 필요가 없는 때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 제1원인이고, 자녀를 위해 노고하지 않으면 어머니로서 할 일을 다 안 한 것 같다는 자책감이 제2원인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잉여(필요없는 나머지)인간으로 취급하여, 자신이 건강하지 못함을 당연시하기까지 한다.


그런 심리이기 때문에, 병을 예방하기는커녕, 병이 와도 자식에 의존하고 병원에 의존하고 의사와 약에 의존하는 걸로 대충 때우는 식이다. 그렇게 해서는 잠깐은 몰라도, 오래 건강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는 근본적 자각이 없다. 아니 위기의식이 있어도 이미 늦은 일이라고 나이탓으로 돌린다. 무엇을 개선할 수 있는지, 자신을 위해 최선의 방법을 찾아 분기하는 맘이 없는 것, 다시 말해 항전 의식의 결핍이 가장 큰 문제이다.


안돼요!끝까지 싸워야 해요!

식욕이 없어도 밥을 챙겨 드셔요. 일이 없어도 몇 걸음씩 걸으시고요.


휴대폰 이쪽에서 소리쳐 드린다.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다. 못 들으신 모양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의 늙으신 어머니는 이 쾌청한 가을 날씨에 햇빛 좋은 줄도 모르고 저녁을 맞아, 소화불량 혹은 식욕부진 혹은 원인불명의 통증과 고뇌들로 종일 시달린 몸을 누이고, 한밤에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쓸쓸함으로 쇠잔한 꿈을 꾸실 것이다. 그 꿈 속에 스치는 그림자는 누구이며, 무엇이란 말인가.


정녕 이것이 소위 '위대한 어머니'의 하루이런가.


하늘 저 멀리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확성기라도 있으면, 지금이라도 그것에 대고 '진격 나팔'을 불고 싶다. 일어나세요, 어머니. 창문을 열면 태양이 있어요. 어머니가 맥없이 누워있는 창문이 크게 흔들리도록 소리를 높여서, 어머니가 잊어버린 삶의 긴장감을 깨우고 싶다.


어머니, 들으세요. 이제부터가 아주 중요해요. 어머니란 인생극을 해피엔딩해야요. 정신줄을 놓으면 안 돼요. 가장 중요한 싸움이 남아 있어요. 그게 오래 걸릴지 짧게 끝날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까, 구두끈을 단단히 매고 다시 싸움을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마지막 승부에서 이겨요, 우리.


살아 숨쉬는 한 절대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 뒷방노인네를 자처하는 어머니에게, 이 말 한 마디 설득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될 줄이야. 지금보다 젊은 시절엔, 시골길 자정의 컴컴한 산고개를 넘어 금방 죽어간다는 친지가 사는 마을에 다녀오고도,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었다고 말했던 여전사 같던 어머니인데도 말이다. 설득은커녕...통화가 꺼지면 주름진 얼굴에 눈물을 뚝뚝 흘리실 어머니 모습이, 그대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No Woman No Cry.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ㅡ한때 우리 눈에 여전사나 다름 없던 어머니였어도, 죽기 전에 흘려야 할 눈물의 정량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그래도 이건 아니지... 마지막에 웃을 수 없다면, 세상과 싸우며 다섯 아이를 키운 보람이 뭐란 말인가. 고개를 젓다가 떠올린 노래.


해피엔딩이라는 노래다.

언젠가 한때 제자였던 젊은 엄마를 만나 이 노랫말을 전해 주며,우리 해피엔딩하자고 온 마음으로 격려했던 일도 잊지 않고 있다.


《Happy ending》

......You never sing happy songs
And yet you smile all the time that we’ve
known
It seems like something happened back
then.....
......너는 결코 행복한 노래를 부르지 않아.
항상 웃고 있지만,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이것은 중국에서 주로 활동하는 Proximity Butterfly란 그룹이 부르는 노래이다. '근접의 나비'(Proximity Butterfly )라고나 번역할까, 악단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이름은 리드보컬 Joshua의 어느 날, 나비와의 마주침과 상관있다고 한다.

두 부부가 자전거를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Joshua가 부인 Heather의 뒤를 따르고 있을 때였다. 나비 한 마리가 보였다. 작은 나비가 어찌 자전거 속도를 따르랴, 이대로 멀어지겠지 했는데, 웬걸! 나비가 홀연 Heather가 전진하면서 일으키는 바람을 타더니 그 속도로 따라가는 것이다. 어느새 조금 뒤처졌을 때는 바로 뒤의 Joshua가 일으키는 바람을 타고 계속 따라온다. 한참을 그러다가 나비는 멀어졌다. 작은 시작도 크게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나비가 보여주는 듯했다. Joshua는 이날의 나비에게서 착안을 해서 그룹 이름을 짓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 이름에는 , 환경이 완벽해지기만을 기다릴 게 아니라, 어떻게든,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 되도록 스스로 노력하는 거야, 열심히 움직이는 거야, ㅡ이런 내발적인 메시지가 담겼다고 한다. 나비가 보여준 교훈이었다. 자전거가 휙 지날 때 일어나는 바람을 타고, 아까까지에 비해 훨씬 더 빠르고 멋지게 날아가던 나비를 보면서, 그 나비에게 받았던 감동이 메시지가 되어 이름에 담긴 것이다


해피엔딩의 노래 가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참고 견디노라면 반드시 해피엔딩을 만들어내게 될 거예요.(I believe that all the happy endings aren’t found but with patience are made)...”


그날 제자와의 약속은 여느 때와 다른 분위기였다. 제자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고 같이 성당에 갔다. 제자가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 처음 가는 성당길, 내가 함께 가줬으면 해서였다. 어린 두 아이를 성당 예배에 참석시키고 싶다는 것이었다. 천주교인이 아닌 나이지만, 엄마 혼자서 어린 두 아이는 무리라서, 나는 알았다고 했다.

종로 연지동을 지나며, ㅡ연동교회

아이들이 너무 어리기에 어딘가에 들르기는 힘들다. 그래서 성당에 가고 오는 길이 우리 둘의 대화 공간이었다.

"해피 엔딩엔 인내가 핵심이에요."

지하철 입구에서, 내가 제자에게 말한다. 노래 가사의 한 구절이다. 제자는 문득 걸음을 멈춘다. 다시 한번 제대로 듣고자함이다. 나도 덩달아 발길을 멈춘다. 그리고 방금 말한 구절을 다시 한번 외워준다. 그 순간 우리의 표정이라니. 대단한 인생의 진리라도 전수하는 것처럼, 나도 제자도 아주 숙연했을 것이다.


내 학생으로 강의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20대의 아리따운 아가씨였다. 그런데 그 사이 세월이 년이나 흘러서, 네댓 살 되는 연년생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남편도 없이.


학업을 계속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가정을 이루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대학원을 다니는 도중에 식을 올렸다. 결혼을 하면서 그 애가 떠났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개의 도시에 떨어져 지냈던 셈이지만 우리 사이엔 편지왕래가 있었다.


제자가 둘째 아기를 낳고부터는 편지내용도 길어졌다. 아내로 엄마로 나날이 바쁘지만 행복하다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 저는 정말 행복을 실감하고 있어요.’라는 편지를 받은 지 채 얼마 지나지도 않았던 것 같은 어느 여름날, 그 애로부터 느닷없는 문자 하나가 날아온다.


‘선생님 제 남편이 죽었어요.’ㅡ 부고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나에게도 충격이어서, 그런 문자를 읽고 있는 나 자신이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메시지를 받던 그 순간, 나는 오직 그날의 찌는 듯한 더위에만 온 신경을 모으고 있던 참이었다. 아휴, 더워라...하필이면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은 아파트에 살 때인 그 해, 날씨는 왜 그리 더웠는지...


나는 무사안일, 날씨가 더운 것만이 문제인데, 이제 30대 초반, 젊디 젊은 나이의 제자가 남편을 잃었다는 것이다. 젊은 부인이 갑자기 짝을 잃은 것이다.

기가 막혔다. 아니 믿기지가 않았다. 뭐라고 답신을 보내야 할지 알맞은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답신을 보내지 못했다....


이듬해에 제자를 만난 것이다.

시부모 대신 앞장서서 남편의 장례절차를 밟았다고 했다.

어린 자녀들 때문에 울음도 참았다고 했다.

아무리 뜯어봐도 짝을 잃은 여성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너무나 젊고 고운,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제자에게 늦게나마 뭐라 위로를 해 주고 싶은데...입안이 하얘지는 것처럼, 언제나 뱃속에 가득 떠돌고 있던 무수한 언어들이 한꺼번에 어디론가 숨어들어 머리카락 한 올도 나오지를 않는 것이다... 나중에 겨우 들려준 위로의 말이란 게 Proximity Butterfly의 《happy ending》 가사였던 것이다.


그날, 제자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다시금‘해피엔딩’의 가사를 음미하면서, 혼자만의 사색에 빠졌들었다.ㅡ 해피와 엔딩의 조합이라니, 도중의 행불행으로는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건 마지막이고, 살아있는 한, 끝까지, '해피'를 희망하며 계속 전진해야 할 것이다.


참고 기다린다는 건, 바로 그렇게 최후의 끝까지 희망의 불꽃을 들고 걸어간다는 의미.


삶은 진행형이다. 우리 모두는 행렬을 짓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고 있다. 누군가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울상이고 누군가는 짊어졌던 짐이 사라져서 화를 내고, 그래도 걸어야 한다고. 홀연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 바로 내 목소리다.


엄마. 약한 마음을 버리세요. 자포자기하는 식, 그건 틀렸어요. 그런 마음과 싸우세요! 끝까지 싸우는 거예요. 그게 바로 승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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