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질문에 대한 답, 난 무엇을 기대하는가?

책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은 단상

by 박이윤정

단상 1. 자기연민에 빠진 비장애 고학력 백인남성 스토너. (왓챠피디아 한줄평 중)으로 축약해버리기에는 문학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

나는 사회과학 같은 서적은 개인의 서사를 통해 보편성을 도출하여 사회를 이해하려는 시도로 본다. 그러나 문학은 보편성 속에서 개별성을 발굴하는 작업을 하려는 시도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문학을 접할 때와 사회과학류의 책을 읽을 때는 접근법이 달라야 한다고 본다.

초반 4장 정도까지만 이 역함을 참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사람의 생애에 빨려들어가 이 사람과 함께 나이들어가고 함께 범인으로서 삶에 공감하고 죽음까지 도달하는 감각에 이르를 것이다.


단상 2. 인생에서 난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중략)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떄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중략)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아름다운 것을 더 깊게 잘 탐닉하고 창조하며 살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1 정도는 하면서 살고싶다. 하기 싫은 일을 9 정도 할지라도.


눈물 닦으면 에피소드라는 말을 좋아한다. 삶이 쉽다고 생각한 적 없다. 삶의 고비의 순간들을 잘 버텨낸 뒤, 그 고비를 넘고 난 뒤에는 삶의 고통을 적당히 웃을 수 있는 이야기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어린 시절에는 타협하지 않는 삶을 꿈꿨었다. 그러나 살다보니 타협하지 않는 삶은 나도 주변도 많이 다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정의는 너무 자그마했다. 더 넓고 크게 바라보기 위해서 타협협, 협상, 그 안에서 모순된 나를 만나기도 수백번이었다. 흔들리는 것이 삶일지니. 중요한 것은 내 삶에 매번 있는 타협과 모순을 의심하기도 하고 잘 받아들이기도 하며 잘 균형을 잡고 지내는 것이라는 걸. 타협하는 나를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그걸 기억하고 하지 않고는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상 3. 떠오른 글_버트런트 러셀의 내가 살아온 이유 (What I Have Lived For)

범인인 스토너가 인생의 끝에 느낀 것과 세계적인 석학 버트런트 러셀이 삶에 대한 이유를 정리한 문장이 비교가 되어 떠올랐다.


인생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뚫고나간자와 인생을 주어진 대로 마주했던 자가 마주한 데에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아래 러셀의 말에 심장이 뛰었고, 지금은 스토너의 말에 가슴이 아리다. 그때는 내가 비범한 사람이 되어있을 줄 알았고, 이제는 내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러셀의 문장을 보면 가슴이 뛴다. 위에서 내가 기대하는 삶을 잊지 않고 살고 싶다. 비범한지 비범하지 않은지는 죽음 앞에서는 그 누구도 의미 없을 지는 모르겠으나, 죽을 때 나는 그래도 어쩔 수 없었던 것들에 어쩌기 위해 애썼던 사람으로 주변에 기억되기를 바란다. 죽음은 한 번 뿐이니 잘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독서모임에서 나왔고, 그 말이 내 가슴에 꽂혔다. 그 한 번뿐인 죽음의 순간 내 삶을 돌아볼 때 나 스스로 무수히 고민하고 희망을 말하는 인간으로 내 삶을 살아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바란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삶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 그리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동정심이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처럼 나를 이리저리 휘몰아쳐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나는 우선 사랑을 찾아 헤맸다. 첫째는 사랑이 황홀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 황홀함은 너무나 강렬해서, 남은 생애를 전부 바쳐서라도 단 몇 시간의 즐거움과 바꿀 만한 가치가 있었다. 둘째는 사랑이 외로움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그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떨고 있는 의식은 세상의 끝 저편으로 난 차갑고도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결합 속에서, 성자들이나 시인들이 상상했던 천국의 모습을 미리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찾던 것이었으며, 인간의 삶치고는 너무나 과분해 보일지 모르나 결국 나는 그것을 찾아냈다.
그다음으로 나는 지식을 찾아 헤맸다. 나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다. 나는 왜 별들이 반짝이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수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흐름 위에 군림하는 피타고라스적인 힘을 파악하고자 애썼다. 비록 많은 것을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아주 조금은 이룰 수 있었다.
사랑과 지식은 나를 하늘 높은 곳으로 이끌어 주었다. 하지만 언제나 동정심이 나를 다시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메아리가 내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굶주리는 아이들, 압제자에게 고통받는 희생자들, 자식들에게 짐이 되어버린 무력한 노인들, 그리고 외로움과 빈곤과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은 인간의 삶이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웃음처럼 보였다. 나는 이 악을 덜어보고자 갈망했으나 그리하지 못했고, 나 역시 고통받았다.
이것이 나의 삶이었다. 나는 나의 삶이 충분히 살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기꺼이 나의 삶을 다시 한번 살아보고 싶다. -송은경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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