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나비 Nov 01. 2023

귀에 붕대를 감고 밀짚모자를 쓴 남자와 한 밤의 산책

어느 화가의 흔적을 따라 유럽 곳곳을 여행한

작가의 글을 읽었다.

화가의 여정과 그를 따라 움직인 작가의 여정,

여정마다 남겨진 화가의 편지와 작품들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주변을 맴돈다.


잠들기 직전, 책을 덮고 누웠는데 감은 눈 뒤로

몇 점의 그림들이 아른거린다.

다시 일어나 책을 펼쳐, 그림들을 찾아본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밤의 프로방스 시골길'


책을 덮고 다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는다.



밀짚모자를 쓰고 귀에 붕대를 감은 한 사람이

시골길 위에 서있다.

한 손엔 담배 파이프를, 다른 한 손엔 지팡이를 쥐고

밤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가끔 담배 파이프를 입으로 가져갔다 다시 내린다.


어느덧 그의 옆에 서있다.

나를 잠시 쳐다본 그는 다시 밤의 하늘로 시선을

돌린다. 잠깐이었지만 나를 보는 눈 빛은

자화상에서 본 그의 눈 빛이다.

이제 알겠다. 꽤 많은 그의 자화상 중에서

왜 저 두 점이 아른거렸는지.


주변을 둘러본다.

커다란 사이프러스나무들이 예전 시골길 전신주

마냥 서로 거리를 두고 우두커니 서있다.

귀에 붕대를 감고,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가

밤의 프로방스 시골길 위에서 별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나는 바로 옆에서 보고 있다.


담배 파이프를 잠시 물었다 내리더니 무슨 말을

한다.

우습게도 이때 내 머릿속엔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바보 같은 생각이 떠오른다.  

'이 남자는 지금 30 대일테니 내가 형이 되는 건가'

이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느라 그의 말을 못 들었다.

자화상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 그는 이내

고개를 들어 다시 밤의 하늘을 바라본다.


아쉬운 마음에 이번엔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본다.

아무 말이나 입 밖으로 나오면 좋으련만,

어떤 말도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뭐라고 말을 하지? 밤공기가 시원하네요?

별이 참 아름답네요? 저 나무의 이름은 뭔가요?

그냥 보통의 인사를 하는 게 나으려나?

반갑습니다? 영광이네요?

이것도 저것도 다 마음에 들지 않는 찰나,

불현듯 한 문장이 떠오른다.


"제 자화상 좀..."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한다.

머저리 같은 인간아. 생각을 좀 하고 말을 해야지.

내가 내 얼굴을 그려야 자화상이지...

부끄러운 마음에 다시 한번 말을 꺼낸다.


"제 초상화를 좀..."

아까의 무표정한 얼굴보다는 조금 편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어? 웃은 건가? 살짝 입꼬리가 틀어졌는데!

웃었다. 웃은 게 분명하다.

귀에 붕대를 감고, 밀짚모자를 쓰고, 시골길 위에

서 있는 이 남자를 내가 웃게 하다니!

가슴이 터질 것처럼 벅차오른다.

이러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지만,

지금은 그건 그거대로 상관이 없을 것 같다.

발이 땅에 닿아 있지 않는 느낌이다.


이윽고 그가 몸을 돌려 시골길을 걷기 시작한다.

뒤쳐질세라 따라 걷는다.

귀에 붕대를 감고 밀짚모자를 쓴 남자와

한밤의 산책이다.




눈을 뜬다.

이미 분주하게 일상이 시작되고 있다.

찬물로 세수를 몇 번이나 해본다.

아예 세면대에 머리를 박고 흐르는 물로 계속

적셔보지만

밤의 산책에서 그와 나눈 얘기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허탈한 마음에 어제 본 책을 펼친다.

그가 본격적인 화가가 되기 이전 동생에게 쓴

편지다.


나는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글로 써보고 있는

중이야. 네가 나를 허랑방탕한 건달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야. 사실 건달들도 알고

보면 나름대로 다 엄청난 차이가 있거든.

천성적으로 게을러터지고 개성도 없는 못나빠진

건달이 있는가 하면, 자기 의도와는 다르게

속으로는 엄청나게 하고 싶은 일이 많지만

손발이 묶여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란다.


 

* 사진출처:pixab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