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하늘의 본래 색깔이 회색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신고 나갔던 운동화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더군요.
운동화 속 양말은 슬쩍 쥐어짜도
작은 텀블러 하나는 금세 채울 정도로
흠뻑 젖어버리는,
그런 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걸음을 옮길 때면 다 젖은 운동화 속에서
끼익끼익, 쩌억쩌억 하는 소리가 나더랬습니다.
왠지 모르게 이 소리가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그건 마치,
오래된 나무배에서 나이가 일흔은 넘은 뱃사람이
오래된 나무 노를 저을 때 나는 소리 같았습니다.
오래된 나무배에서 나이가 일흔은 넘은 뱃사람이
오래된 나무노를 저을 때 나는 소리는 대체 어떻게
아냐고요?
이것 참,
제가 그 얘기를 안 해드렸나 보네요.
그러니까, 그게..
포항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 나오는
작은 어촌마을입니다.
지금은 ‘동’으로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의 행정구역은 ‘리’였고
이곳 사람들은 이 마을을 ‘우리 부락’이라 불렀습니다.
여름 피서지는 항상 이곳이었습니다.
비포장 산등성이길을 넘어가다 보면
아주 작고 오래된 부락이 보입니다.
그때부터 마음은 조급해집니다.
외지사람이 거의 없는 해변에서의 물장구와
바위틈사이에서의 게잡이를 하러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어
엉덩이가 움찔움찔거립니다.
대나무와 노란 고무줄로 만든 작살을 가지고
물속으로 자맥질을 하면
얼굴 반을 덮는 커다란 물안경너머로
놀래미들이 헤엄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정신을 집중하고 엄지와 검지사이에
노란 고무줄을 걸고 대나무 작살을 힘껏 당깁니다.
가장 커 보이는 놀래미를 목표로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 뒤
고무줄을 놓습니다.
피잉.
쏜살같이 작살이 앞으로 튀어 나가고
운 좋게 놀래미 한 마리가 작살 끝에 꿰입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동시에 머금은 산소가 거의 다 떨어져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재빨리 작살을 위로 향하게 들고 수면 위로
올라옵니다. 물안경을 벗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작살 끝을 살펴봅니다.
에게..
작살에 꿰인 놀래미는 어린 나의 작은 손바닥보다도
더 작습니다.
그것 참 이상합니다.
물속에서는 분명 엄청나게 큰 놈이었는데 말이죠.
물속 바닥에 널린 게 성게고,
자맥질 몇 번만 하면 전복도 따고,
운이 좋으면 문어도 한 마리 잡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해
진득하게 시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계속 엉덩이를 움찔움찔거리고 있으면
아빠가 운전하는 흰색 봉고차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지 비포장 산길을 움찔움찔 달려갑니다.
오래된 마을이라,
집들도 참 오래되었습니다.
그 오래된 집들 중에서도 마을 중간쯤에 위치한,
들어가는 골목길은 차 한 대 겨우 다닐 정도로
좁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면 꽤 널찍한 마당을
갖춘 반전 매력의 오래된 한옥집이 있습니다.
바로 저의 외갓집입니다.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기 전,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펌프가 보입니다.
보통 물고기나 오징어를 손질하는 곳이지만,
여름 피서철엔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마치고 온
손주들의 샤워장입니다.
한여름 땡볕에도 뼛속까지 시린
얼음물 같은 지하수가 나오는 펌프라
빨개벗은 손주 녀석들은 바가지로 물을 덮어쓰면서
춥다고 방방 뛰며 오두방정을 떨어댑니다.
마당으로 들어서면
긴 툇마루를 가진 본채가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조그마한 창고가 있습니다.
창고 옥상에는 빨랫줄이 대여섯 줄 정도 세워져
있는데, 빨랫줄에는 외할머니가 직접 손질한
오징어들이 해풍과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말려지고
있습니다. 바짝 말라가는 오징어가 불쌍해 보였지만
저녁이 되면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입마다
오징어 다리가 하나씩 물려있는 걸 보면..
컹컹컹~
아, 창고 뒤로는 조그마한 야채밭이 있는데
밭의 끝자락에 커다란 개집이 세 개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개집 안에는...
몸집이 성인 남자만큼 커다란 도사견들이
마당에서 나는 외부인들의 소리에 몸을 세우고
컹컹 짖어댑니다.
밤이 되면 마당에 돗자리를 깝니다.
그리고 두 귀퉁이는 마당 끝부분에 있는
나뭇가지에 걸고, 나머지 두 귀퉁이는 집 기둥에
매달아 네모나고 커다란 모기장을 쳐서 다 같이
눕습니다.
지난여름에 누가 저 개집 근처에 갔다가
물려 죽을뻔했다더라 라는 무시무시한 괴담을
매년 토씨하나 바꾸지 않고 말하고 있으면
양 옆이 점점 좁아들어옵니다.
거기에 귀신 얘기가 보태지면 가위바위보에 져
양 끝에 누운 녀석들은 혼비백산 가운데로 파고들다
이내 투닥투닥 싸움이 벌어집니다.
티격태격 싸우다
깔깔거리며 웃다
무심코 바라본 하늘은
아..
정말이지 지금까지 제가 본 하늘은
다 뭐였나 싶을 정도로 예뻤습니다.
불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캄캄한 밤중
관광객들은 모르는 아주 작은 어촌 마을
이 캄캄한 밤중
아주 작은 어촌 마을의 밤하늘은,
보고 있노라면 온몸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칠흑같이 새까만 천에다
수 백, 수 천 개의 반짝이는 보석을
실로 매달아 놓은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그때의 밤하늘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지금까지 제가 본 어떤 작품보다 빛나고
어떤 순간보다 아름다웠으니까요.
꼬끼오~
어느 집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늘은 눈이 부시게 파랗고,
물결은 잔잔합니다.
아주 가끔,
이제 어부일을 내려놓으신 외할아버지가
작은 나무배를 태워주십니다.
일본 브랜드의 모터가 달려있지만
해변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를 운행하기에
외할아버지는 길고 커다란 노를 젓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나이가 많을지
이 노가 나이가 많을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진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물어볼걸 그랬습니다.
기다랗고 커다란 노는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나뭇결은 표면이 하얗게 일어나고
전체 면 거의 대부분은 길게 갈라졌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나무 노는 아주 단단해 보였습니다.
힘차게 노를 젓고 있는 외할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외할아버지는 180센티미터 정도의 큰 키에
말씀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게다가 아주 미남이셨죠.
이 계보를 저희 외삼촌이 물려받았고,
(아, 외삼촌은 키가 180센티가 넘으셨지만
수다쟁이셨습니다. 과묵하게 태어났지만 7녀 1남의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외삼촌 다음으로 저에게 대물림되었습니다.
뭐,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하지만 저희 아버지 키가 170센티미터가 안 되는 걸
보면,
흠.. 키는 확실히 외탁을 한 모양입니다.
노를 젓는 구릿빛의 쭈글쭈글한 외할아버지의
손등에 핏줄이 불끈불끈 튀어나옵니다.
노를 젓는 방향대로 배는 방향을 돌리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때입니다.
이때 저는 들었습니다.
오래된 나무배에서 나이가 일흔이 넘은 뱃사람이
오래된 나무 노를 저을 때 나는 소리를요.
삐이익, 끼익, 쩌어억...
오래된 배와 오래된 노가 만나
나무끼리 맞닿아 내는 삐그덕 거리는 소리와,
오래된 노와 오래된 바다가 만나
마치 친구처럼 서로를 반기며 내는
물살을 가르는 소리.
오래된 배의 선체에 오래된 파도가 부딪치며 내는,
듣고 있으면 가슴이 뻥 뚫리는
마법 같은 그 철썩이는 소리를.
눈부시게 파란 하늘 위로
둥글게 둥글게 빙빙 돌다
날개를 활짝 피고 활강하는
바다새들의 울음소리까지.
그 여름,
그렇게 눈부신 항해를 했습니다.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와
신문지 위에 비에 흠뻑 젖은 운동화를 올려두고
말리고 있는데,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온 열두 살 딸래미가
물어봅니다.
- 아빠 운동화가 왜 이래?
그 물음에 답을 하려다 문득 이 생각이 났습니다.
다 젖은 운동화를 신고 빗속을 걸어올 때 나던
이 소리가 왜 그렇게 신경이 쓰였는지.
그저 비 오는 날이 좋아 그런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장마와 운동화,
그리고 외할아버지였습니다.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