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묵직한 저음 악기
짧은 달리기를 하며 출근길을 나선다. 남들 눈엔 그저 걷는 듯 보이겠지만, 아주 살살, 천천히 뛰는 중이다.
코로 깊게 호흡하며 나만의 속도로 나를 알아가며 달리는 이 주법을 '마인드풀 러닝(Mindful Running)'이라고 한다. 일주일을 쉬었더니 이 감각이 무척 그리웠다. 피곤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덜어내는 달리기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어폰을 쓰자 내 귓가에는 심신을 어루만지는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음악을 배경 삼아 뛰다 보니 금세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다다랐지만 귀에는 여전히 음악이 머물러 있다.
지하철에 올라타서도 나지막한 새소리와 어우러진 경쾌한 선율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순간,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찾아왔다.
사회생활을 위해 억지로 끌어올리고 있던 입꼬리가 '툭' 하고 내려갔다. 긴장했던 얼굴 근육이 스르르 이완된다. 억지 표정이 벗겨지고, 비로소 내 본연의 얼굴로 돌아오는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앞사람의 묵은 머릿기름 냄새도, 옆구리를 찌르는 뾰족한 팔꿈치도, 뒷사람과의 미묘한 자리싸움도... 음악이 흐르자 이내 평화로운 풍경이 되었다.
멜로디 뒤에서 내 마음을 둥둥 울리는
이 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 문득 궁금해진다.
첼로?
더블베이스? (콘트라베이스)
막귀인 내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만,
묵직한 저음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꽉 잡아주는 기가막힌 이 악기가 참 대견하다.
마음이 이완되니, 비로소 이 빽빽한 공간의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희망을 실은 열차.
면접을 보러 가는 떨리는 꿈을 실은 열차.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들의 노동 열차.
학업에 지친 학생의 고단함을 실은 열차.
혹은 데이트를 앞둔 연인의 설렘을 실은 열차.
어떤 이에게는 마지막 출근길이,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출발이 될 이 열차가 오늘도 만원, 초만원이 되어 힘차게 달리고 있다.
지옥철이라 불리는 이곳이,
음악 한 곡으로 천국이 되는 순간.
짜증 나던 밀접 거리가
서로를 지탱하는 온기로 느껴지고,
불편했던 타인의 존재가
같은 시간을 함께 건너는 동료로 보인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 좁은 열차 안에서,
이 바쁜 아침에,
각자의 이야기를 품은 채로.
음악이 없었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 이어폰을 꽂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연대감.
오늘도 우리는 함께 출근한다.
음악은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을 때, 그리고 그 소리가 내 여유를 찾아주어 타인의 삶까지 안아보게 할 때, 비로소 나에게 진정한 '쉼'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