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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구사 Dec 14. 2020

너에게 거절할 수 없는 술잔을 주지 1

1. 아직도 무한도전을 봅니다

우리는 월급을 세 번 받기도 전에

회사가 평행세계임을 깨닫는다.



회식이 싫다, 너무.

하반기에 원주 독립출판 교류회에서 싫어하는 것들에 대한 글

을 모아서 책을 내자고 했을 때. 나는 바로 ‘회식’이 떠올랐다. 회

식은 내가 참여하는 수많은 가면극 중에서도 가장 싫은 것 중에

하나다.


윗사람들이 월급을 그냥 줄 수는 없으니 던져대는 일거리를 나

또한 월급을 그냥 받을 수는 없으니 꾸역꾸역 처리한다. 사무실

가면극의 줄거리다. 여기서 쓰는 가면들은 가끔 불합리하거나 답

답하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목적성이나 규칙성은 담보된다. 어쨌

든 ‘일을 처리한다.’라는 커다란 줄거리가 있다 보니 가면극은 예

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이뤄진다. 국장, 과장, 소장 등 정해진 역

할에 맞는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오르기 때문에 상대의 행동과 내

가 해야 할 행동은 어제와 비슷하고 내일도 비슷하다. 따라서 비

교적 덜 불안하다.


회식이 싫은 이유는 기본 줄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날 마신

술의 양과 기분, 참석한 구성원, 심지어 날씨와 장소에 따라서 예

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상대방의 가면도 순식간에 바뀐

다. 중국의 가면극 변검처럼 술잔이 스칠 때마다 확확. 술기운이

올라갈수록 언제는 과장이었다가 언제는 인생 선배(내가 원하지

않음에도)로 변하더니, 언제는 능숙한 투자자(내가 부동산에 관

심이 없어도)가 되어 쓸데없는 조언을 건네다가, 순식간에 사회

운동가(애도 안 낳는 요즘 것들을 비난하며), 가정의 수호자(매일

아내와 전화로 싸우면서도)로 변한다. 회식이라는 무대 위의 가

면극은 이렇게 아비규환인데 참석해도 아무 이득은커녕 손실만

있다. 근무의 연장이라면서 돈도 안 주고(제일 화남), 내 개인 시

간을 뺏는다(두 번째로 화남). 거기다 술 마시면 근손실도 온다.

도대체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다.


나는 무한도전의 거의 모든 부분을 사랑하고, 특히 무한상사는

내가 손에 꼽는 가장 좋아하는 특집이다. 야유회부터 회사 로고

만들기, 점심 메뉴 정하기, 명절에 상사 챙기기 같이 직장인이라

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준하 형의 정

리 해고 특집은 몇 번이나 돌려봤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내가 회

사를 나와서 공무원 시험을 보게 된 데에는 무한상사 특집이 큰

영향을 주었다. 짐을 싸서 회사 로비를 나서는 준하 형을 보며 나

도 조만간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무한상사의 회식 장면은 유난히 보기 힘들었다. 재미

가 없었다는 게 아니라 다른 특집보다 유난히 내 모습이 겹쳐 보

여서 괴로웠다. 박 차장이 머리에 넥타이를 묶을 때부터 가슴이

서늘해졌다. 유 부장 어깨에 손을 올리고 머리에 술잔을 털자 비

슷한 장면을 어디서 본 것 같았다. 아슬아슬한 분위기에서 누군

가 야자타임을 제안하자 눈을 질끈 감았다. 회식과 야자타임은

휘발유와 불꽃과도 같아서 둘이 만나면 반드시 인명피해가 뒤따

른다.


내가 직접 겪은 회식과 야자타임의 결합은 폭발한 부장님이 깐

족거리던 대리님 머리에 마른안주가 담긴 쟁반을 내리치면서 끝

났다. 오징어와 대구포가 자유롭게 하늘을 날던 장면이 생생하

다. 함께 날아간 마요네즈와 간장 종지는 옆 테이블 덩치 큰 남자

의 정수리에 안착했다. 무한상사에서도 회식과 야자타임의 위험

한 결합은 인명피해를 불러왔다. 박 차장이 깻잎 두 장을 들고 차

를 타러 나가다 차에 치이며 마무리되었으니까. 그런데도 다음날

멀쩡히 출근한 것까지 완벽하다. 역시 김태호 PD는 극사실주의

연출가다.


만악의 근원인 술은 보통의 술자리보다 회식 자리에서 더 흉악

해진다. 보통의 술자리와는 다르게 회식에서 만취한 자는 다음날

숙취 환자로 끝나지 않는다. 사무실 출근과 함께(보통 지각하는

바람에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자리로 걸어간다) ‘어제 기억 안

나세요?’ 나 ‘김 대리, 잠깐 나 좀 보지?’ 같은 무서운 소리를 들어

야 하는 형벌이 따라붙는다.


내 첫 회식은 보험회사 월 마감 회식이었다. 100여 명의 영업조

직에 유일한 남자였고, 24살짜리 신입이었던 나는 첫 회식에 말

그대로 ‘던져졌다.’ 그 자리에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하긴 힘들다.

다만 회식이 끝나고 단추가 다 뜯긴 셔츠를 캘리포니아 해변 스

타일로 명치쯤에 묶고 집으로 걸어갔다고만 말하겠다. 울먹거렸

던 거 같기도 하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회식 라이프는 그 후로도

몇 번의 소소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예를 들어, 티셔츠 등짝에 누군지 모를 발자국이 나 있었다든

지. 책상 위에 웬 타다 남은 굵은 양초와 깨끗하게 닦인 처음 보

는 구두 한쪽이 올려져 있다든지. 옷장에 긴팔 옷들이 반팔이 되

어있다든지(잘린 소매는 양말 서랍에서 나왔다) 하는 평범한 일

들이 벌어진 이후. 나는 회식에서 살아남기 위한 스킬을 하나둘

씩 개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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