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직도 무한도전을 봅니다
스킬 0 회식 날에는 가방을 챙기지 않는다.
회식 날 중간에 자연스럽게 빠지기 위해서는 가방을 챙기지 않
는다. 가방을 챙겨서 일어나는 모습이 누군가에게 걸리기라도 하
면 ‘박 대리 어디가? 도망가는 거 아냐?’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성격이 좀 나쁜 상사라면 가방을 빼앗
아 자기 옆에 두기도 한다. 이런 일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는 가
방을 아예 두고 출근하거나, 챙겼더라도 최소한 회식 장소가 아
닌 외부 다른 곳에 보관하도록 한다.
스킬 1 이온 음료든 물이든 잔뜩 마셔라.
소주를 한잔 마시면 물은 한 컵이 기본이다. 물을 많이 마시는
게 술이 덜 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회식에 가기
전에 여유가 된다면 이온 음료를 잔뜩 마시고 가는 것도 좋다. 특
히 편의점에 가면 이온 음료는 보통 2+1이나 1+1행사를 하는 경
우가 많다. 이걸 주는 대로 다 마시고 회식에서 물까지 자주 마시
면 술에 잘 취하지 않는다. 사실 화장실에 들락날락하느라 취할
새도 없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스킬 2 손은 눈보다 빠르다.
술 버리기. 보통 맥주 글라스나 물컵을 테이블 밑에 놓고 술을
몰래 버리는 게 기본이다. 테이블 밑에 손이 내려갔다 올라오는
게 신경이 쓰인다면 테이블 위 물수건에 붓고 나중에 테이블 밑
에 둔 컵에 짜내면 된다. 관건은 무심하게 툭 버리는 것. 긴장해
서 뻣뻣하게 움직이거나 얼른 버리려고 빨리 움직이면 티가 난
다. 그냥 툭. 이게 숙달되면 열에 여덟은 안 걸린다.
파생 스킬 2-1 임기응변을 준비해라.
가끔 술 버리는 타이밍이 좀 안 맞았을 때. 그러니까 열에 둘 정
도 되는 상황인 술을 버리다 눈이 딱 마주쳤을 때 말이다. ‘자네
지금 뭐하나?’ 하고 정색하는 상대방이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필
요한 것은 임기응변과 대수롭지 않다는 행동이다. 한마디로 ‘아.
머리카락이 들어가 있어서요.’ 하고 다시 잔을 쓱 내미는 것이다.
전혀 별일 아니라는 듯 행동해야 상대방도 뭐라고 하기 애매해진
다.
입사 첫 회식에서 밑에 놓아둔 컵에 술을 버리다 걸렸다. 하필
상대가 욕 잘하고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과장이었다. 정색한 과
장이 ‘너 밑에 컵 뭐야 인마, 지금 퇴주잔 깔아놓은 거야?’ 하고 소
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전부 쳐다봤다. 신입사원들에게 막 대하기
로 유명한 인간이라 짧은 순간 나를 안쓰럽게 보는 눈길들이 느
껴졌다. 눈빛을 거의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는데 ‘어휴, 불쌍한
신입이 또 뭐하나 걸렸나 보다.’였다.
분위기가 싸늘해지려는 일촉즉발의 상황. 나는 영문을 모르겠
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요? 이거 물 잔인데요?’ 하고 글라스
가득 있는 술을 한 번에 마셔버렸다. 컵을 탁 내려놓고 미소를 지
으며 과장의 눈을 마주 보았다. 한 3초 정도 그러고 있자 과장이
‘허.’하고 웃더니 소주병을 다시 잡았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이
‘자자, 얼른 받고 소주 한잔 따라드려.’ 하면서 어색한 공기를 흩
어냈다. 어차피 마셔야 했을 술을 마셨을 뿐이다. 좀 재수가 없었
을 뿐. 어차피 완벽한 방법은 없고 재수 없는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더군다나 여긴 재수 없는 사람이 술에 취하기까지 한 회
식 자리 아닌가.
스킬 3 반찬 그릇을 활용하라.
눈보다 빠른 손도 없고, 임기응변에도 자신이 없는 사람을 위한
방법이다. 회식 자리가 고깃집이고 밑반찬으로 동치미가 나오는
곳이면 금상첨화다. 일단 술을 버릴만한 그릇을 점찍어둔다. 테
이블 위에 있는 동치미 그릇이든, 물컵이든, 맥주잔이든 상관없
다. 점찍은 그릇을 알맞은 장소에 두고 타이밍에 맞게 술을 버리
면 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 술을 버린 그릇에 반드시 고기나
반찬 따위를 담근다. 누군가 술을 버린 동치미를 마셨다가 ‘뭐야,
누가 여기 아까운 술을 버려놨어?’ 하고 소리치는 걸 방지하기 위
해서다.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동치미나, 고춧가루가 떠다니는
물은 마실 사람이 없으니까.
스킬 4 생각보다 너에게 관심이 없다.
참여 인원이 많을수록 효과적인 마음가짐이다. 신입사원들에
게 나가서 바람을 자주 쐬라는 조언을 하면 나갔다가 혼나면 어
떻게 하냐는 말을 종종 듣는다. 아니 혼 좀 나면 어때서? 거기다
화장실에 사람이 많았다는 핑계부터 얼마나 대꾸할 거리가 많은
데 그런 걱정을 하는가 말이다. 더군다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
보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당신이 화장실에
가든 바람을 쐬러 가든 자리를 왔다 갔다 하든 간에 각자 자기 살
기 바쁘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술 마시기 바쁘고, 아부 떨기 좋
아하는 사람은 간부들 잔 채우느라 바쁘다. 사실 당신이 앉아 있
었는지 어땠는지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자주 들락
날락하면서 술잔을 피하시라.
스킬 5 마무리는 똘똘하게 하자.
스킬 4와 연계해서 사용하는 스킬이다. 나는 일 차가 슬슬 끝나
가면 머릿수를 센 다음 먼저 쓱 빠져나간다. 그리고 곧장 편의점
에 달려간다. 그리고 머릿수만큼 아이스크림을 산다. 주머니 사
정이 좀 나을 때는 꿀물을 사기도 한다. 둘 다 2+1이나 1+1행사
를 자주 하므로 비교적 부담도 적다.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회식
장소에 돌아가서 하나씩 챙겨주면 게임 끝이다. ‘아니 박 대리 왜
이렇게 안 보이나 했더니, 이거 사러 갔었구먼? 고마워 잘 먹을
게.’ 하는 칭찬과 함께 자주 자리를 비웠던 것도 납득시키는 것이
48 아 직도 무한도전을 봅니다 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가끔 이 스킬을 알려주면 특정 간부 몇 명만 비싼 숙취해소 음
료를 사주고 나머지는 메로나를 먹이는 사람이 있는데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사무실마다 꼭 한두 명씩 있는 물어뜯기 좋아하는
인간은 공짜 메로나를 먹으면서도 험담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런
인간들에게 간부만 챙기는 모습은 딱 물어뜯기 좋은 부분이다.
괜히 돈 쓰고 욕먹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술 취한 인간들 입에는
모두 똑같은 메로나를 물려주자.
그냥 회식 못 간다고, 가도 술은 안 마신다고 하면 되지 뭘 그런
구차한 방법까지 쓰냐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실은 알고 있
지 않은가? 왜 회사원들이 회식에 목을 매는지. 술잔을 받지 않았
을 때 받을 불이익이 가늠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월급을 세 번 받기도 전에 회사가 평행세계임을 깨닫는
다. 겉으로 드러난 회사와 속에 숨겨진 진짜 회사는 평행세계처
럼 공존해있다. 겉으로 드러난 회사는 모든 제도가 합리적이고,
의사결정은 수평적이며, 민주적이고, 성희롱은 생각도 할 수 없
으며 인사평가는 공정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속에 숨겨진 평행
세계의 회사는 다르다.
우리는 알고 있다. 공정한 인사평가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
인지. 인사철마다 생기는 알 수 없는 결과와 주말 골프장 운전기
사를 자처하는 이들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어느 금요일
저녁, 평소 손바닥을 비비지 않은 서울 사람을 월요일부터 부산
으로 출근시키는 통보의 서늘함에 대해서도. 그런 서늘한 소식은
여기저기 퍼져나가며 사람들의 목덜미를 ‘스윽’ 스친다. 사람들
이 목을 움츠리고 회식에 끌려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술잔을 거
절할 수 없게 만든다.
밤마다 거절할 수 없는 술잔을 받아 드는 우리의 노고는 이뿐만
이 아니다. 날마다 노 사원처럼 부장님의 패션을 칭찬하며 약삭
빠르게 비위를 맞춰야 하고. 박 차장처럼 구시렁거리면서도 명절
에 부장님 댁 부엌에서 앞치마를 멘다. 정 대리처럼 일이 없어도
회사에서 쪽잠을 자며 충성심을 보일 때도 있다. 하 사원처럼 넉
살 좋게 부장님을 존경하는 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정 과장이 어떻게 되었는지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