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by 박승아

"첫눈이 내리는 날, 여기서 만나자."

곧 연기가 되어 사라질 한 마디를 남기고 그는 떠나갔다. 그녀는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갑작스레 그녀를 떠났고, 그녀 혼자만 의미 없는 약속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그녀는 이직에도 성공하고 해외 파견도 나갔다 온 후 승승장구했다. 누구나 그녀의 인생을 선망했다. 그녀는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역시 멋진 삶을 살고 있었다. 운영하던 카페는 벌써 몇 개나 지점을 내주었고, 지역 신문에도 실렸다. 그는 그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커피 마니아들로부터 꽤 인정받고 있었다.




"난 네가 만들어주는 커피가 제일 맛있어."

그녀의 소박한 고백이었다. 그녀에게 그는 너무 소중했다. 그도 역시 그녀가 너무 소중했다. 벌써 2년을 이어온 만남은 서로에게 굳건한 확신을 주었다. 그도 그녀를 잘 알았고, 그녀도 그를 잘 알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커피도, 그가 좋아하는 영화도, 그들에겐 모두 특별한 것이었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했다. 혹시나 전쟁이 나게 되면, 우리가 처음 만난 그곳에서 만나자.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게. 그러면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꼭 그러자고 대답했다. 전쟁이 나면 어떤 것들을 먼저 챙겨야 하는지 토론도 했다. 그는 신나서 얘기했지만 그녀는 그런 그를 보는 게 신이 났다. 그녀는 매일같이 그를 위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너랑은 진짜 말이 안 통한다."

겨우 다시 2년 만에, 그들은 서로를 가장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만들어주는 커피가 식을 때까지 노트북을 쳐다보게 되었고, 그녀가 재잘대는 이야기에 더는 대답하지 않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당연시하고 그가 그녀의 커피를 만들어주는 일도, 그녀가 그를 위한 영화를 고르는 일도 없게 되었다. 그녀는 근처 카페를 애용했고, 그는 그녀가 떠나자마자 TV를 켰다.

그는 점점 짜증이 났다. 그녀가 자신을 배려하는 것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때로는 왜 이 만남을 이어가는지 회의가 들었다. 그는 매일 아침 문자로 그녀의 안부를 물었지만, 사실 궁금하진 않았다. 그저 습관이었고, 돌아오는 답에도 열의는 없었다.




그녀는 이사를 준비했다. 한동안 다른 지사에 있었지만 다시 본사로 돌아갈 때가 됐다. 몇 년 동안 정들었던 장소를 비우며 그녀는 괜한 추억에 잠겼다. 그러다 지난날의 약속을 떠올렸다.

'첫눈이 오면 만나기로 했지.'

허공에 맴돌던 그 말은 결국 누구의 손에도 잡히지 않은 채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다시는 잡을 수 없는 신기루 같은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 장소는 기억나지도 않았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눈길을 걸으며 그녀는 추운 손에 입김을 불었다. 붉은 목도리에 모자까지 썼지만 추위를 어찌할 순 없었다. 다시 돌아온 본사는 예전만큼의 열정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커피나 한 잔 할까.'

새로 생긴 아담한 카페로 향하는데, 누군가 카페에서 나왔다. 카페 앞 입간판을 정리하던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이다. 이런 날은 손님도 별로 없다. 따뜻한 코코아를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무료함에 카페 앞이나 정리하자고 생각했다. 입간판에 쌓인 눈을 툭툭 털고 일어났을 때, 그녀와 눈을 마주치곤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와 그녀는 한동안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로의 흔들리는 동공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내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언젠가 나를 한 번 떠올렸을까. 서로에게 닿지 못할 말들이 각자의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겨우 한 걸음을 내디뎠다. 멈칫, 그도 손을 뻗었다. 멈칫, 서로의 어색한 움직임이 공간의 분위기를 메운다.


그날은 그 겨울의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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