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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현 Mar 22. 2023

옷 좋아하세요..?

저는 좋아합니다만

옷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꽤나 최근까지 단벌신사로 살 거라고 검은색 티셔츠에 청바지만 주구장창 입는다 떵떵거리긴 했다만, 옷은 언제나 좋아했다.


패션 커뮤니티에 가입도 해보고, 유튜브는 물론 옷과 관련된 책도 사서 읽어봤다. 그냥 옷을 잘 입고 싶었다기보다는 기왕 입고 다녀야 하는 옷인데 우리가 입는 옷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디자인의 변화를 겪어왔는지가 궁금했다. 더불어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를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과 그들이 향유하는 문화는 어떨지가 궁금했던 마음도 컸다.


사실 나는 그다지 많은 옷을 소화하기 쉬운 체형은 아니다. 키는 겨우 160을 넘는 단신에 몸은 말랐는데 두꺼운 편에 속하고 팔은 키에 비에 너무 길다. 베레모 58(이었을 거다, 아마) 사이즈로 머리가 그리 작은 것도 아니다. 잘 어울리는 옷을 찾기란 나에게 있어서 여간 쉬운 일이 아닌 것임은 확실하다.


아마 그것 때문에 오기가 발동했었나, 더 많이 찾아보고 입어본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많이 입어보진 못했고,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옷을 좋아한다고만 했지 잘 입는다고 말은 안 했다. '멋진 아웃핏을 내고 거리를 활보한다', 나에겐 멋진 아웃핏부터가 고역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취미였다. 특기라고 말할 순 없어도, 코딱지나 파고 이리저리 튕겨내던 중학교 시절 빈지노의 칼하트에서부터 시작된 꽤나 오랜 시간을 함께한, 성인이 되기까지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오래된 취미였다. 10년을 가까이 넓혀온 취향의 바운더리이자 내가 쓸어 담은 나름의 아카이브였던 것이다.


확실한 건 나는 이 옷에 담긴 문화가 좋다.

짧은 역사 속에 얽히고설킨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좋다. 디자이너를 둘러싸고, 그들의 아틀리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런저런 스캔들이 재밌다. 지금의 옷들이 과거의 옷들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직접 디깅 하는 과정이 즐겁다. 아마 평생 취미로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뭐, 처음부터 이런 옷을 둘러싼 문화에 관심이 생긴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내 또래 모든 남자들의 학창 시절 로망(적어도 내 주변 친구들에게는 그랬다), 빈지노 형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 옷에 대한 첫 관심이었다. 칼하트 비니가 잘 어울리면 그만이었다. 엄마를 졸라서 해외주문으로 받은 칼하트 티셔츠가 너무 커서 일주일은 시무룩했던 가슴 아픈 추억이 있다. 그 시절 빈지노와 그가 입은 칼하트는 아마 나의 사춘기 시절 감수성과 꽤나 괜찮은 시너지를 일으키지 않았나 싶다. 나에게 빈지노는 적어도 나이키 슈즈가 아닌 칼하트였다. 말이 샛길로 향했는데 처음엔 그냥 멋있어 보이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그렇게 이것저것 입어보고 친구들과 긁어모은 정보들을 나누고 나와 어울리는 취향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면서 그 문화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이 궁금해졌다. '이 옷은 왜 이런 디자인일까?' 'LVC는 왜 비쌀까?' '아니 저거 워싱 좀 봐,,' '오리지널 개파가 가격은 어디까지 오를까?' '그래서 빌 나이가 쓴 안경이 어디 거라고?' 등등 근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관심은 패션을 넘어서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탐구로 자리 잡았다. '픽사 시작할 때 나오는 스탠드가 어디건 줄 알아?' '텀블러 산다고? 스탠리가 근본이지!' '이게 구글 직원들이 쓰는 타이머래'....

나를 근본맨이라 불러줘라.


아마, 결국엔 아카이빙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뭐가 되었든 간에 말이다. 그냥 겉으로 보기에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기보다는 알 사람들만 아는, '와 저거 어디서 구했지?' '맞아 저게 근본이지' 등등의 평단의 찬사를 받고 싶은, 농도 짙은 취향의 수준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같다.


사실 어디 가서 '너 옷 잘 입는다'라는 소리는 못 듣지만, 옷 얘기라 하면 하루종일 떠들어댈 수 있는 게 나의 아카이빙이다. 그저 깊게 파고들고 문화를 향유하고 싶을 뿐이다. 신나서 쉴 새 없이 떠들어댈 수 있는 아카이빙, 아마 그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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