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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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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현 May 21. 2023

이사

살면서 이사를 그리 많이 다녀보진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이사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마음속 깊은 데서 맴돌듯 우러나오는 기억이 있다. 아마 기억이라기보다는 추억에 가까운 것이다.


5학년때였다. 서울에서 목회를 하시던 아버지는 전주로 사역지를 옮기시면서 우리 가족은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당시 간신히 열 살을 넘긴 어린 내가 아는 세상에서 이사를 간다는 것은 친한 친구들과의 이별이었고, 20평 남짓 작은 아파트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공부방이자 놀이터였던 정든 집과의 작별 정도로 기억한다.


사실 친구들과의 헤어짐이 눈물을 훔칠 만큼, 정든 기억을 도둑맞는다고 느낄 만큼 아쉽거나 슬프진 않았다. 어쩌면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간다는 기대 혹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불안 등등의 감정이 엉켜서 아쉬움이 낄 자리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가 보는 세상은 그게 전부였다. 잠깐의 아쉬움, 새로운 환경으로의 긴장 따위의 감정들이 전부였다. 곧 사라질 낯선 공기였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확실한 것은 그 당시 내가 본 세상과는 달리 부모님이 바라보는 세상은 훨씬 더 크고 더 무거운 짐을 감당해야 하셨을 것이다. 두 분에게는 더 오랜 아쉬움, 묵은 냄새처럼 좀체 사라지지 않는 익숙한 공기, 책임져야 할 핏덩이 둘, 마주해야 할 더 큰 세상이 있었겠지. 자식들을 품은 손틈새로 세상의 좋은 것들만 보여주고 싶은 그들의 마음이 있었겠지.


이사 가기 전날 밤을 아직도 기억한다.

좁은 집안을 꽉 채우던 짐들이 다 비워지고 흰 벽지에 둘러싸여 거실 한복판, 휴대용 매트리스에 드러누운 우리 셋, 엄마 뱃속에 한 명 더.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영화를 많이 보여주셨다. 그의 두툼한 외장하드 속에는 다양한 영화들이 담겨 있었는데, 늘 새로운 영화를 담아주신 날이면 일주일 내내 질리는 법도 모르고 대사를 외울 때까지 봤던 기억이 있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버지는 영화 한 편을 받아오셨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마다가스카였나.


작은 소리 하나에도 울리던 빈 방에는 온 가족이 숨을 죽이고 영화소리만 조용히 들렸다. 영화가 끝나고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좀체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나를 달래듯 아버지는 뻔하듯 잔잔한 응원을 해주셨던 걸로 기억이 난다.


성인이 되고 나서 세상을 홀로 서고 살아가려다 보니 좀체 쉬운 것이 하나 없는 듯 하소연하는 마음에 한동안 잊었던 오랜 추억들을 하나 둘 꺼내 들춰보는 밤이다. 홀로 하는 이사가 꽤나 텁텁한 건지, 내가 보는 세상이 그 사이 커져버린 건지 그다지 희망차고 즐겁지는 않다만, 어릴 적 가족과의 소중한 추억을 들추게 해 준 그득한 바람 정도로 생각하자니 나름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아마 내일 밤은 짐정리를 모두 마치고 정해둔 영화 한 편으로 하루를 마무리하지 않을까. 때아닌 어리광을 부리면서 집에 전화 한 통 드리면 그날의 기억처럼 잔잔히, 그러나 깊게 살아갈 용기를 한번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들의 사랑에 그저 고마워할 수밖에 없는, 끝끝내 그들에게 내가 빚진 건 사랑뿐임을 소심하게 글로 고백하는 밤이다.


5월 6일 토

이사를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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