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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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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현 Jun 17. 2023

흔적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인생의 변곡점을 가져다줄 다이나믹한 경험은 없다만, 매일의 감정에 충실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인지라, 이랬고 저랬던 어제를 그저 마음속 깊이 품고 살아가는 중이다.


우리의 마음은 발가벗겨진 몸 같아서 나름의 이유와 모종의 부끄러움 때문에 이리저리 감추기 바쁘다. 어제의 말실수가, 그날 적은 한 줄이, 그날의 만남과 오늘의 불편함이 때때로 지우고픈 과거가 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감추고픈 마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새어나가는 감정들이 있다. 아픈 상처가 될 수도 있고, 짝 없는 사랑이 되기도 하며, 아직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 옹졸한 다짐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하건대 빛나던 과거는 없고 모든 기억과 경험은 나의 이전 버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흑역사 같은 거 말이다.


많은 기억을 짊어지는 우리네 인생이기에 다양한 감정의 꼭짓점이 이리저리 뻗쳐나가는 모양이다.


복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실수조차도 망각한다나 뭐라나, 니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껏 별일이 아닌 듯 외면해 온 기억들이 마음 한 구석에 켜켜이 쌓여있다. 이마저도 결국 나를 만들어가는 각각의 조각이라 생각하며 구태여 모른 채 하지 말자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당위 없이 복된 사람이 될 바에야 수많은 의문과 회의, 후회와 창피조차도 짊어지듯 품어내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당연스레 실수도 하고 상처도 주고받으며 부끄러움조차 공유함으로 지나온 길을 나아갈 길로 연결 지어 살아가는 것이 응당 태어난 사람의 사명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자신의 세계를 깨부숴야 한다던 헤르만 헤세의 말은, 어쩌면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나의 부끄러움과 모든 치부, 우리로서 만들어낸 해진 마음까지도 끝끝내 품어내며 오늘을 어제로 기억하고 내일로 소망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뭐든 흔적을 남긴다. 결국 그 흔적이 후광처럼 지나온 길을 지나갈 길로 밝혀준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칠흑같이 어두운 것일지라도, 지나온 과정의, 그 산전수전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 내일을 향한 기대로 우리를 견인해 줄 것이라 믿는다.


삶은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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