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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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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현 Oct 10. 2023

고백

지난 몇 주간 나름의 확신을 앞세우며 바리스타를 꿈꿨다. 호주 땅에서 바리스타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커피 한잔이라도 내리겠노라 매일을 다짐했다. 그렇게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일도 그만뒀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핑계를 늘여놓으며 사람도 잘 만나지 않았다. 오로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매일같이 걸음을 밖으로 향하며 이력서를 돌렸다.


동네 방네를 쏘다니며 나를 어필했다. 꼭 일하고 싶다고, 열심히 하겠다고. 2주를 그렇게 돌아다니고선 이렇게 생각했다. '세상이 언제까지나 내 뜻대로 돌아가진 않는구나'라고,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들도 있구나 체념하듯 적어낸다.


열심히 했다.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래서인지 후회는 남기지 않았다. 마음속 열정 내지 다짐, 간절함을 다 쏟아냈기에 더 이상 남은 게 없다고 해야 하나, 안 되는 건 안되는구나 덤덤히 현실적으로 나를 돌아보는 중이다.


사실상 처음부터 쉽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남은 비자 기간도 얼마 남지 않은 터라 일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더 큰 후회를 남길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었기에 결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주변의 응원인지 걱정인지 스스로의 다짐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목소리들은 에둘러 듣지 않겠노라 외면했다. 온전히 이 과정의 시작과 끝을 홀로 받아들이며 감당하고 싶었다. 어쩌면 너무 나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대차게 걷어낸 만남 속에서도 갚아야 할 고마움이 참 많다.


어쨌거나 상황은 상황이다. 언제까지나 배짱 하나로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젠 돈도 거의 다 썼고,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결정을 번복한다는 것이 꽤나 고통스럽기는 하다만, 이마저도 다 배움과 경험의 과정이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삶에 있어서 모쪼록 포기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고자 했지만, 더 이상의 고집은 객기라며 스스로를 다그치는 중이다.


아마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된 듯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래저래 모든 마음을 다 쏟아내 버린 탓인지 크게 후회는 없다. 오히려 이렇게 된 이상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오른다. 종이책도 읽고 싶고, 순대국밥도 먹고 싶고, 가족들도 그립다. 때가 찼다고 해야 하나, 내려놓고 돌아갈 시간이다.


커피를 내릴 때 '적정 추출시간'이라는 게 있다. 그라인딩 된 원두를 담은 바스켓을 머신에 꽂고 에스프레소 샷을 추출하면 처음 15초 동안은 강한 카페인이 추출된다. 대체로 쓰고 가벼운 맛이 난다. 그러고선 25초에서 35초 정도까지 시간이 지나면 원두 자체가 가진 은은한 향미까지 다 추출이 된다. 가령 과일향의 산미나 견과류의 고소함 등 디테일한 향이 마지막까지 나와야 맛 좋은 커피가 되는 거다. 물론 사용하는 원두마다, 기계마다 혹은 취향에 따라 추출시간은 25초에서 35초 사이를 오가겠지만, 이러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본인에게, 나아가 손님에게 선보일 수 있는 맛있는 커피가 되는 거다.


생각도 비슷한 듯하다.

불현듯 피워낸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어떤 일을 앞두고 잔뜩 부푼 마음에 무턱대면 일을 그르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항상 신중하게 기다리다 때가 되면 행동으로 옮길 줄 알아야 한다. 그 타이밍이라는 게 참 어렵다. 그래서 결국 삶으로 겪어봐야 알 수 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얼마간의 시간이 내가 먹는 원두에 가장 적절한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기계를 세팅하듯 말이다. 이건 좀 쓰네, 좀 더 묵직하면 좋겠는데, 하나하나 맛보면서 알아가는 수밖에 없다.


둘을 알기 위해선 하나를 알아야 하고, 하나를 알기 위해선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 하나에 실패를 온전히 겪어낸다면 둘의 도전에선 성장의 열쇠가 된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다음에는 다른 길로 향하면 된다. 그렇듯 아쉬움은 남길지언정 좌절하지 말고 더 나아질 내일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수밖에 없다.


꽤나 즐거웠던 8개월이었다. 한국에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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