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은 1934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대 재학 시절 문리대 학보에 이상론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어느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기성 문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계기로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라는 글을 올리면서 문단에 정식 데뷔하게 되었다고 한다.
책의 전반에서 작가는 무엇이든 순순히 받아들이거나 넘기지 말고 옳고 그름을 다시 한번 되짚어 생각해 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위의 등단 계기만 보아도 그가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직면하기까지 얼마나 깐깐하게 자신의 생각으로 삶을 진솔하게 살아내려고 노력했을지 짐작이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굴렁쇠를 굴리는 아이를 기획했다는 사실 말고는 이어령이라는 사람을 잘 알지 못했다. 이후 책을 다 읽고 그의 약력을 살펴보니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훤회 명예위원장과 유네스크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등 여러분야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다양한 삶의 경험에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해 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해하며 책을 펼쳤다.
작가는 죽음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죽음을 느꼈다고 했다. 그렇게 평생 죽음을 느끼고 살았지만 죽음을 직면한 지금을 그는 철창 밖으로 나온 호랑이가 자신에게 덤벼드는 것처럼 죽음이 두렵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넘어서 자신의 죽음을 관찰하는 것까지가 그의 몫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범함에 놀랐다.
"우리가 진짜 살고자 한다면 죽음을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와야 한다네. 눈동자의 빛이 꺼지고, 입이 벌어지고, 썩고, 시체 냄새가 나고..... 그게 죽음이야. 옛날엔 묘지도 집 가까이 있었어. (중략) 죽음의 흔적을 없애면 생명의 감각도 희미해져."라는 대목에서는 평소 늘 죽음을 곁에 두면서 삶을 살아내고, 글을 쓰던 내가 작가의 말처럼 나는 정말 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을 늘 염두에 두어야만 지금을 더욱 뜨겁고 열정적으로 살아낼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을 다시금 확인받은 느낌이었다.
나이 들어 투병하면서 볼이 쑥 들어가 병색이 만연한 작가의 얼굴. 책을 읽다가 불현듯 건장했을 시절 그의 얼굴이 궁금해져 사진을 검색해 보니 독수리를 보는 듯 그 눈매가 차갑고 날카로워 보였다.
"풀리건 안 풀리건 그 문제를 푸는 게 철학이네."
"그렇지. 내가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다른 점이 바로 그거였어. 한번 문제를 붙들면 풀릴 때까지 놓지 않았지."
"그래. 그래서 사는 내내 불편했지. 아이 때도 어른이 되고서도. 이상한 사람이다, 말꼬리를 잡는다, 얄밉다는 소리만 들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야. 나 좋다는 사람 많지 않아."
그는 물음표와 느낌표를 오가며 살았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살아가지만 진실과 사실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고 둥글둥글하게 사는 사람들의 삶이 안타깝다고도 말했다. 그의 매서운 눈매가 그의 평소 삶을 대하는 태도를 말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불편하고, 이방인처럼 이질감으로 세상을 살아왔지만, 그는 진실에 더 가까워지기를 바랐고, 그래서 그는 외로운 삶을 자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랑받지 못한 자신을 아래 글처럼 되돌아 본다.
"나는 상대를 비방하려는 게 아니라 납득이 안 가면 질문을 하는 본능을 따라갔어. 그런데 질문을 받으면, 다들 자기를 무시하고 놀린다고 착각하는 거야. 질문 없는 사회에서 자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거라네. 그런 문화 속에서 나는 사랑받지 못했네.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어."
책의 중간인 8장에서는 '죽음의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니라 고향'이라는 제목으로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내가 그랬지. 죽음은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얘야, 밥 먹어라'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중략) 죽음이라는 게 거창한 것 같지? 아니야. 내가 신나게 글 쓰고 있는데, 신나게 애들이랑 놀고 있는데 불쑥 부르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이쪽으로, 엄마의 세계로 건너오라는 명령이지. 어릴 때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잖아. 이제 그만 놀고 생명으로 오라는 부름이야...... 그렇게 보면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이지. 어머니 곁, 원래 있던 모태로의 귀환이니까."
신나게 놀고 있는데, 신나게 글을 쓰고 있는데 엄마가 '밥 먹어라'라고 부르는 것이 죽음이라는 말이 너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금 이승의 삶을 '신나게 논다'라는 표현은 주어진 지금의 삶이 굴레처럼 버겁기만 한 내게는 무척 생소하게 다가왔다. 그 버거운 인생에 대한 의문을 그는 이렇게 풀어준다.
"강화도에 화문석이 유명하잖아. (중략)그런데 나는 무늬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좋아서, 그걸 달라고 했지. 그런데 그 무문석이 더 비싸다는 거야."
'화문석은 무늬를 넣으니 짜는 재미가 있지요. 무문석은 민짜라 짜는 사람이 지루해서 훨씬 힘이 듭니다.'
인생도 그렇다네. 세상을 생존하기 위해서 살면 고역이야. 의식주만을 위해서 노동하고 산다면 평생이 고된 인생이지만, 고생까지도 자기만의 무늬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해내면, 가난해도 행복한 거라네.
인생 그렇게 살면 노예 되는 거야.
어차피 엄마의 품 같은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의 정해진 수순이라면 아이처럼 신나고, 즐겁게 놀다 가라는 말이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 노예처럼 의식주만을 위해서 살지 말고 즐겁게 나만의 무늬를 만들면서 살라는 그의 말이 무척이나 큰 힘과 위로를 주었다. 그 즐거움과 신남이 어떤 것인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마지막 부록 편의 '라스트 인터뷰'에서 그는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최악은 없다고. 노력하면 양파 껍질 벗겨지듯 삶에서 받은 축복이 새살을 드러낸다고. 빅뱅이 있을 때 내가 태어났고, 그 최초의 빛의 찌꺼기가 나라는 사실은 '수사'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라고. 여러분도 손 놓고 죽지 말고,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끝까지 알고 맞으라고. "종교가 있든 없든, 죽음의 과정에서 신의 기프트를 알고 죽는 사람과 모르고 죽는 사람은 천지 차이예요."
인생을 당연한 내 몫이 아니라 '선물'로 받아들인다면 지나치게 비교하거나 억울함보다는 감사와 자족의 마음이 수순으로 따라오리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신이 나에게 준 선물은 어떤 것일까? 이미 주어짐에도 나는 어쩌면 수없이 지나쳐 왔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으며 나는 죽음에 대해 친구와 원 없이 이야기를 나눈 느낌이었다. 죽음을 더 이상 금기어처럼 어둡게 바라보기 보다 삶에 수순으로 따라오는 죽음을 알게 되었다. 애쓰지 않아도, 기다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내 눈앞에 당도해 있을 죽음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번 생애에서 원 없는 삶을 살아내고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죽음을 맞이하기로 마음먹었다. 원 없이 죽음에 대해 털어놓았으니 지금부터는 삶을 이야기해 볼 시간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