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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Sep 10. 2018

제일 잘 하는 게 뭔데?

글씨를 쓰는 이유

언니는 뭘 제일 잘 한다고 생각해?

곰곰히 생각해봤다. 영어는 아니야, 일본어는 더더욱 아니구. 인터넷을 잘하지? 그건 누구나 잘 하잖아. 덕질도 동생에 비하면 라이트 덕후인 척하는 머글이나 다름없고.


아, 생각났다!

“나 글씨 잘 써!”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던 취준생 13개월차였다. 앞으로 몇 십년은 일하며 먹고 살아야하는데도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취업센터에서 배운대로 자소설을 적어 여기저기 내밀고만 있었던 시절. 내가 자소설에서 가장 어려운 건 직무와의 연결이었다. 잘하는 게 뭔지 모르는데 나를 아무 직무랑 연결시키는 게 가능할리가 있나.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친동생과 저녁을 먹다가 훅 들어온 질문이었다. 내가 제일 잘 하는 것.. 불쑥 물어본 질문에 곰곰히 고민해봤다. 난 뭘 제일 잘하더라, 남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리고 글씨를 잘 쓸 수 있다는 걸 장점이랍시고 얘기했는데 그 때부터였을까? 꼼지락거리는 게 즐거워진 건.

글씨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게 있나, 고민하던 차에 동생이 언니 글씨로 이거 이거 좀 써줘- 라고 부탁해왔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때 동생은 수험생이었다. 글씨를 써주다가 이걸 스티커로 만들면 붙이기 좋잖아? 라고 생각했다.


대행사 인턴 때 제작을 맡기던 업체를 찾아보니 스티커 제작도 가능했다. 그렇게 나는 무작정 내 글씨로 다이어리에 붙이기 좋은 스티커를 제작했다. 그리고 유통을 하기 어려우니 아는 언니가 기획한 대학생 페스티벌에 가서 사람들에게 직접 나눠줬다. 그렇게 나는 내 글씨로 스티커를 만들기 시작했다.


만들고 나니 이 다음 버전을 고민하게 됐다. 자연스레 글씨 스티커가 필요한 타겟층을 고민하게 됐고, 해결책으로 닿은 것은 군화와 곰신. 내가 곰신이었던 시절, 편지와 다이어리 가득 채웠던 스티커들이 생각났다. 정성스레 쓴 손글씨들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생각하며 오랜만에 곰신 카페에 들어가 나눔을 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꽤 폭발적이었다. 그렇게 스티커 4천장을 팔고 나니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조차 당황했다.

아, 이제 더 쓸 게 없나, 하고 생각할 때 슬그머니 떠오른 건 최애의 노래가사였다. 당시 내 인생에 둘도 없는 덕질을 하고 있을 때라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모르고 (구)오빠들 미안해..) 노래가사를 정성스레 적었다. 총 4가지 버전이었고 3천장 정도였던 거 같다. 개인적으로 이 때가 제일 짜릿했던 거 같아.


그렇게 인연이 닿고 닿아 다양한 작업을 했다. 최애 전시회에서 나눔으로 나갈 스티커 작업을 의뢰받았고, 메세지북에 직접 내 글씨로 편지를 써 최애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또 배우 이준기님의 생일파티 포스터 제작을 하기도 했다. 어떤 분은 엄마에게 보낼 편지를 직접 써달라고 하셨기에 누군가가 전하지 못한 마음을 손글씨로 꾹꾹 눌러담기도 했다.

배우 이준기님 생일파티 포스터 (출처. 텐아시아 한국경제)

그 때도 물론 직접 만든 스티커와 글씨로 만났던 다양한 경험을 담은 자소서로 꾸준히 회사에 지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가 마지막이다.” 라고 마음 먹었던 회사에 면접 기회가 닿았고 스티커 세트를 들고 가 자신있게 면접관에게 내밀었다. 그렇게 그 회사가 나의 첫 번째 회사가 되었다.

동서 맑은티엔 애니메이션 “사랑이 오나 봄” (출처. 유투브 캡처)

회사에서도 다양한 용도로 글씨를 썼었다. 컨텐츠에 올라갈 글씨, 캠페인 영상 타이틀에 들어갈 글씨, 편지에 사용될 글씨, 상패에 들어갈 글씨 등등.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글씨를 이용한 제작 물품을 만드려 노력했다. 문구류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고 내 물품 리스트에 대한 욕심도 끝이 없었으니까. 회사 다니는 중간에도 지인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의뢰를 받아 다양한 글씨를 썼다. 그러다보니 TV에도 출연했고, 이 모든 게 글씨 쓰기를 좋아하면서 생겼던 너무 신기한 경험이었다.

출처. olive 원나잇 푸드 트립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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